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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문학으로 본 역사]<3> 푸시킨『대위의 딸』

지식창고지기 2009. 8. 3. 17:40

[주경철의 문학으로 본 역사]

3. 러시아 농민반란 속 피어난 사랑

푸시킨『대위의 딸』

출처=중앙선데이   주경철 | 제45호 | 20080120 입력

머리통아, 내 머리통아
일만 죽도록 한 내 머리통아!
꼬박 삼십삼 년을
군대에서 고생만 했구나.
아, 그러나 머리통이 얻은 건
돈도 아니네 기쁨도 아니네.
칭찬의 말도 아니네.
머리통이 얻은 건 고작
높이 솟은 두 기둥에
그 사이 가로지른 단풍나무 들보에
비단실 꼬아 만든 올가미라네.
-『대위의 딸』 7장에 인용된 러시아 민요

러시아 농민들은 18세기가 지나갈 때까지도 여전히 농노(農奴) 신분이었다. 농노라 함은 말하자면 노예와 자유민의 중간 형태로서, 신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지주 귀족에게 완전히 종속되어 있었다. 이들은 심하면 1주일에 6일 동안 귀족의 땅을 경작해주고 나머지 하루만 자기 논밭에서 일을 했다. 귀족들은 농민들을 극심하게 착취했을 뿐만 아니라 재판권까지 마음대로 행사할 수 있어서 그야말로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상태가 호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화된다는 데 있었다. 차르 정부는 농노에 대한 귀족들의 지배를 강화시켜 주는 대가로 귀족들의 충성을 이끌어내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세상을 뒤엎고 새로운 세계를 만들겠다는 홍길동 같은 인물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지사! 푸가초프의 반란(1773∼1775)은 러시아 역사상 최대의 농민반란이었다.

일러스트=남궁유
그로부터 60년이 지난 1836년,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알렉산드르 푸시킨이 이 사건을 소재로 소설을 썼다. 러시아 역사상 최대의 농민반란을 러시아 최고의 천재 시인이 작품으로 그려냈다면 어떤 모습이 될까? 비장하고 처절할 것 같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의외로 밝고 목가적이며 심지어 유머러스하기까지 하다. 그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가족사 혹은 낭만적인 연애사의 관점에서, 즉 일상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들 속에서 해석하였다.

귀족 자제인 그리뇨프는 17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변방인 벨로고르스크 요새에 장교로 부임하게 된다. 가는 도중 심한 눈보라를 만나 길을 잃었다가 우연히 만난 농부의 안내를 받는데, 그는 이 농부에게 토끼털 외투를 선사한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이 농부가 사실은 푸가초프로서 바로 이 토끼털 외투 때문에 목숨을 구하게 된다.

요새에 도착한 그리뇨프는 사령관 미로노프 대위의 가족과 친해지고 특히 그 집 딸인 마샤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선임장교인 쉬바브린 역시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결투까지 벌이고, 그 후 쉬바브린은 그리뇨프의 일생의 고비마다 그를 위험에 빠트리는 평생 원수가 된다.

사실 요새라고 하지만 오두막집이 본부이고 그 둘레에 울타리가 둘러쳐진 상태에 불과하다. 병사들은 거의 군사훈련이 안 되어 있어서 “병사들 전원이 오른쪽과 왼쪽을 구별할 수 있게 하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들 중 대부분은 실수하지 않으려고 방향을 틀 때마다 성호를 그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런 곳에 농민 반란군에다가 러시아 정부에 반항적인 이민족 카자흐인들이 합류한 대군이 밀어닥치니 요새는 순식간에 함락된다. 최후의 공격이 시작되기 직전 사령관의 가족들은 마지막 순간이 왔다는 것을 직감하고 서로 인사를 나누며 헤어지는데, 이 부분은 슬프고도 감동적이다.

“새파랗게 질린 딸 마샤는 덜덜 떨면서 이반 쿠즈미치에게 다가가 그의 발 아래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였다. 늙은 사령관은 그녀를 향해 성호를 세 번 그은 다음 일으켜 세워 키스를 했다. 그러고는 이제까지와는 사뭇 다른 음성으로 말했다.

‘자, 마샤, 행복해라. 하느님께 기도하고. 주님께선 너를 버리지 않으실 거다. 좋은 사람 만나게 되거든 주님께서 너희 두 사람에게 사랑과 지혜를 베푸시기 바란다. 나와 바실리사 예고로브나가 살았던 것처럼 너희들도 살아라. 그럼 잘 가라, 마샤. 바실리사 예고로브나, 어서 저 아이를 데려가요. (마샤는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울음을 터뜨린다) 여보, 우리도 키스합시다’.

사령관 부인이 울며 말했다. ‘잘 가세요, 이반 쿠즈미치. 제가 혹시 당신께 잘못한 일이 있거든 용서하세요!’

‘잘 가요, 여보, 잘 가요! 자, 이제 그만! 어서 집으로 가요’.”

사령관과 부인, 부관이 모두 반란군 일당에 의해 참살되지만 그리뇨프와 마샤는 토끼털 외투의 인연으로 겨우 목숨을 구해서 위험을 벗어난다.

푸가초프 일당은 한때 카잔까지 점령하고 모스크바를 향해 진격하였다. 그러는 동안 주인공 그리뇨프는 러시아군에 돌아와 있었으나 그의 연적 쉬바브린의 고발로 적과 내통한 반역자로서 처형당할 위기에 몰린다. 이때 마샤는 여제에게 탄원하기 위해 당시 황실이 모셔져 있던 자르스코예 셀로라는 곳으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우연히 어떤 귀부인과 대화를 나누는데, 사실은 이 부인이 예카테리나 여제였던 것이다. 마샤의 헌신적인 사랑 덕분에 그리뇨프의 무고함이 밝혀지고 결국 목숨을 구한다.

푸시킨은 소설의 중간중간 러시아의 전제정치와 농민들의 열악한 상황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가한다.

“우리는 폭도들에게 약탈당한 마을을 지나가면서 주민들이 몰래 감춰놓은 얼마 안 되는 식량이나마 부득이 징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정은 어느 곳 할 것 없이 마비상태였고 지주들은 숲 속으로 피신해 갔다. 강도의 무리가 도처에서 만행을 일삼았다. 각 부대의 지휘관들은 제멋대로 사람들을 처형하기도 하고 사면해 주기도 했다. 전란의 화염이 휩쓸고 지나간 저 광활한 지역의 상황은 처참했다.”

행간의 뜻을 잘 읽어보면 반란군이나 진압군이나 농민들을 괴롭히기는 마찬가지다. 또 주인공의 입장에서 보면 푸가초프나 예카테리나나 그의 목숨을 구해준 점에서는 똑같다. 그는 푸가초프의 인상에 대해 “이목구비가 번듯한 것이 꽤나 서글서글해 보였고 흉악한 점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는 식으로 호의적으로 그린다. 여제와 도적의 괴수 모두 한편으로 한없이 자비롭고, 다른 한편 한없이 잔인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사실 예카테리나는 무능한 남편 표트르 3세를 독살하고 여제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심지어 표트르 3세는 죽지 않고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뜬소문이 돌아서, 푸가초프를 비롯한 많은 반란 수괴들이 스스로 표트르 3세를 참칭하고 있었다. 황실이 도둑 집단과 다를 바 없고, 도둑들이 황제를 참칭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않다는 것을 가리킨다. 푸가초프와 첫 대면을 한 주인공이 눈보라 속에서 꿈을 꾸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하기에 집으로 가보니 무시무시한 농부(곧 푸가초프)가 자신이 아버지라고 말하면서 벌떡 일어나 도끼를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아버지가 자기 역할을 다하지 못하면 아버지를 갈아치울 수도 있다는 의미이리라.

그러나 이 작품은 그런 낌새가 슬쩍 보이지만 결코 혁명적이지는 않다. 지난 시대 최대의 농민반란을 이야기하면서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사실 온건하다.

“청년들이여! 만일 나의 이 수기를 읽게 된다면 기억해 주기 바란다. 보다 훌륭하고
항구적인 개혁은 일체의 폭력적 강요를 배제한 풍속의 개선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주인공 그리뇨프의 목숨을 구한 것은 ‘대위의 딸’ 마샤의 헌신적인 사랑과 여제의
온화한 사면이었다. 사령관이 축복한 대로 두 주인공은 지극한 사랑을 통해 무너져가는 집안을 재건하였지만, 이런 것이 처참한 농민들 상황을 개선하는 올바른 길이었을까? 귀족 자제인 푸시킨은 변방 끝까지 내려가서 민중의 아픔을 읽기는 했지만, 근본적인 대답을 마련하지는 못한 듯하다. 그러니 농민반란이 일어났다가 잔인하게 진압당하는 일이 계속되었건만 그때마다 농민들의 상황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