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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문학으로 본 역사 <4>17C 과학혁명, 유토피아 문을 열다

지식창고지기 2009. 8. 3. 17:43

주경철의 문학으로 본 역사 <4>17C 과학혁명, 유토피아 문을 열다

프랜시스 베이컨『 새로운 아틀란티스』

 출처=중앙선데이  주경철 | 제46호 | 20080126 입력
일러스트=남궁유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일까?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잘사는 사회가 가능할까?

이런 물음에 대한 답을 추구하는 장르가 유토피아 문학이다.

유토피아는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해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사람들이 바라는 바를 모두 충족시켜 주는 곳이고, 다른 하나는 거꾸로 사람들의 욕망을 적절히 통제함으로써 헛된 망상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화를 누리게 하는 곳이다. 이 장르의 원조 격인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는 후자, 곧 ‘욕망 자제’의 사회라 할 수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예컨대 옷을 멋있게 잘 차려입었다고 해서 인간의 덕성이 뛰어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모든 시민이 다 같이 6시간 노동을 해서 기본 물품들을 생산하고, 그 나머지 여유시간을 이용해 지적·정서적 교양을 쌓음으로써 정신적 만족을 얻으며 살아간다.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전혀 다른 접근 방식을 취한다. 그가 그리는 『새로운 아틀란티스』(1627년 출판)는 ‘욕망 충족’의 사회라 할 수 있다. 잘 먹고 잘 입고 멋진 생활을 하고 싶은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인간의 욕구일진대 그것을 억지로 누르기보다는 차라리 적극적으로 만족시켜 주자는 것이다. 그것을 가능케 하는 힘은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나온다. 이 작품은 흔히 ‘최초의 과학적 유토피아’라고 불린다.

이 작품의 줄거리는 꽤나 단순하다. 페루에서 중국을 향해 항해하던 배가 폭풍우를 만나 조난당했다가 벤살렘이라는 섬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선원들은 이 나라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 온갖 지식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곳에서는 솔로몬 학술원이라 불리는 최고 권위 있는 기관을 중심으로 과학을 연구하고 있으며, 또 세계의 발전된 과학기술을 배우고 받아들이고 있다. 선원들은 솔로몬 학술원 회원인 현자
한 명과 만나 이 기관의 학술 활동과 조직, 목표 등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듣는다.

우선 눈에 띄는 것은 이 나라 사람들 생활의 면면이 대단히 풍성하고 부(富)가 넘쳐나며, 또 그것을 과시하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다는 점이다. 예컨대 솔로몬 학술원 회원이 행차하는 광경을 보면 “푸른 우단으로 장식한 두 필의 말이 끄는 화려한 전차는 금박에다 크리스털로 장식되어 있으며, 상단과 하단은 각각 금테두리가 둘러진 사파이어 판벽과 에메랄드 판벽이었다.” 토머스 모어처럼, 부를 과시하는 사람들을 천박하다고 조롱하는 투의 서술과는 거리가 멀다. 부를 긍정하고 또 그것을 과학기술 발전을 통해 얻으려 한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근대적 성격이 뚜렷하다.

과연 학술원 회원이 설명하는 과학 연구는 근대 자본주의의 발전을 예견하는 각종 분야들을 망라하고 있다. “한번 먹고 나면 그 다음에 오랫동안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고기나 빵·음료수, 또 먹으면 육체가 단단해지고 힘이 솟아나는 식료품”을 생산하고, “유럽 사람들이 갖지 못한 여러 기계를 이용해서 만든 종이나 리넨, 비단, 염료”가 상점에서 판매된다. “유럽에서 성능이 가장 좋은 대포보다 훨씬 탄도가 길고 파괴력이 뛰어난 대포”도 만들며, 바다 속으로 잠수할 수 있는 배도 개발되어 있다.

이 작품이 거의 400년 전에 쓰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베이컨의 과학적 상상력은 뛰어나다. 이 책은 서구 문명이 앞서가게 된 중요한 원천 중의 하나로 흔히 거론되는 17세기 유럽 과학혁명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런데 이 책을 꼼꼼히 읽어보면 베이컨의 과학 연구는 단지 세속적인 부 이상의 것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무엇보다도 ‘과학적’ 유토피아라고 하면서도 이야기 구성이 지극히 신화적이고 종교적이라는 점이 눈에 띈다. 선원들이 죽음의 바다에서 벤살렘 섬을 찾아가는 앞부분에서부터 이 점은 명백하다.

“식량도 없이 천애의 고아처럼 광막한 바다 한가운데에 버림받게 되었으니 우리의 상황은 참으로 절망적이었다. 죽음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낙담치 않고 우리는 소리를 높여 저 하늘에 계신 하느님께 기도를 올렸다. 어둠의 혼돈 속에서도 기적을 행하시는 하느님, 태초 시커먼 어둠이 배회하는 수면(水面)에 마른 땅을 마련하신 하느님이신지라,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무사히 상륙하도록 은총을 베풀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마치 천지창조 이전 상태에 대한 창세기의 서술과 유사하다. 선원들이 이런 상태에서 벗어나 벤살렘 섬에 상륙하는 것은 은총을 입어 하느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양끝이 파랗게 칠해져 있는 노란 지팡이를 짚고 나타나서 천사의 날개와 십자가 표시가 그려진 양피지를 내밀면서 선원들을 맞이하는 공무원의 모습은 하늘나라에서 하강하는 천사를 연상케 한다.

이 나라의 과학 연구는 단순히 인간의 복지를 충족시키는 수단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스러운 뜻을 따르는 길이다. 솔로몬 학술원은 일명 “6일 작업 대학”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하느님이 6일 동안 행한 천지창조의 비밀을 밝혀서 백성들에게 알려준다는 의미이다. “사물의 진정한 본질을 발견하기 위한 목적으로, 피조물을 창조한 신의 영광을 더욱 밝게 드러내면서 동시에 인간이 이들 피조물을 더욱 값지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그들이 스스로 밝히는 과학 연구의 목표다.

그런데 과학 연구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실현한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성경의 창세기에는 하느님이 자신의 모습을 본떠 사람을 창조했고 세상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창세기 1:26∼30). 하느님과 비슷한 존재로 지어졌고 만물을 다스리는 역할을 부여받은 최초의 인간은 수퍼맨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망원경이나 현미경 없이도 맨눈으로 먼 별이나 미생물을 볼 수 있고, 화학분석 도구 없이도 물질의 성질을 바로 알며, 동식물의 생명 현상에 정통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과 교감할 수 있었다. 농담이 아니라 실제 이런 식으로 아담을 해석하는 교파가 중세 유럽에 있었다. 그러나 아담과 이브가 타락으로 인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 사람은 원래의 뛰어난 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 잃어버린 힘을 되찾아 원래 하느님이 지은 대로의 인간으로 돌아가는 길이 다름 아닌 과학인 것이다.

벤살렘 섬은 곧 제2의 에덴동산이며, 이곳 주민들은 과학 발전에 힘입어 원래 인간이 해야 할 일, 즉 우주 만물을 더 잘 이해하고 지배하는 임무를 해 나간다. 이런 관점에서 솔로몬 학술원의 연구 내용을 보면 단순히 과학 수준을 발전시켜 나가는 정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창조 작업을 이어받아서 ‘제2의 창조’를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실험이 성공을 거두어서 나무나 꽃이 제철보다 이르게 열매를 맺으며 개화하기도 합니다. … 자연산 식물에서 새로운 식물의 종을 개발하기도 하며, 한 종류의 식물을 다른 종류의 식물로 성장하도록 조작하기도 합니다. 짐승과 새들을 해부하고 실험해서 인간 육체의 비밀을 밝히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심지어 오늘날 문제가 되는 생명복제(cloning)를 언급하는 부분도 있다.

“우리는 동물을 원래보다 크게 만들거나 작게 만들 뿐만 아니라 성장을 멈추게 하는 방법도 터득했습니다. 동물의 피부색이나 모양, 활동 양식을 자유자재로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종의 동물들을 교배하여 새로운 종의 동물을 얻기도 합니다.”

베이컨이 생각하는 과학의 의미는 하느님의 창조 작업을 인간 스스로 보충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믿음이 상치되는 게 아니라 내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이 책에서 읽을 수 있는 내용이며, 이것이야말로 근대 유럽 문명의 핵심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느님이 허락하는 지복(至福)의 상태’(이것이 우리가 ‘행복’으로 번역하는 서구 개념의 원래 뜻이다)를 저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