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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전체 - 공방전(孔方傳 )

지식창고지기 2009. 8. 4. 21:09

공방전(孔方傳 )

엽전을 의인화한 작품


/ 가전체의 문학사적 의의 / <역사신문>의 기사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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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

이 작품은 엽전(돈)을 의인화하여 '돈의  폐해'를 비판하려 한 가전체 소설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공방(둥근 모양에서 '孔'이라 하고 구멍난 모양에서 '方'이라 함)은 욕심이 많고 염치가 없는 부정적 성격의 소유자로 백성들로 하여금 오직 이익을 좇는 일에만 종사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는 일반 선비들과 달리 천하게 여겼던 시정의 사람들과도 사귀기도 하는데, 이는 '공방'이 단순하게 '돈'을 드러낸다든가 탐욕스러운 한 전형적 인간을 내세운다기보다는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하기 위한 작자의 의도가 반영된 사물로 여겨질 수 있음을 뜻한다.
즉, 작자는 이 작품을 통하여 돈의 내력과 성쇠를 보여줌으로써
사회상을 풍자하는 경세의 효과를 나타내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 <공방전>의 줄거리
  공방은 엽전의 둥근 모양에서 공(孔)을, 구멍의 모난 모양에서 방(方)을 따서 붙인 이름이다. 공방의 조상은 수양산 굴 속에 숨어살았고, 세상에 나와 쓰여진 적이 없었는데 황제 때 처음 채용되었다.
천(泉)은 주나라의 재상으로 나라의 세금을 담당했다. 공방은 그 생김이 밖은 둥글고 안은 모나며, 때에 따라 응변을 잘하여 한 나라의 홍로경이 되었다. 그러나 공방의 성질이 욕심 많고 더러워 돈을 중하게 여기고 곡식을 천하게 여기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근본(농사)을 버리고 장사 잇속만을 따르게 했다. 또 인물을 대함에도 어질고 불초함을 묻지 않고 재물만 많이 가진 자면 가까이 사귀었다. 그것을 미워하는 이의 탄핵을 받고 드디어 쫓겨나게 되었다. 당나라, 송나라 때에 다시 채용되었으나 배척을 받기도 했다.

 

● <공방전> 본문 읽어보기
대원군이 발행한 당백전(1866). 엽전의 모양에서 '공방'이란 이름이 생겼다.
공방(孔方-밖은 둥글고 안에는 네모난 구멍이 있는 엽전)의 자(字)는 관지(貫之-꿴다는 뜻으로, 돈을 꿰미로 만들기 때문에 자를 관지로 하였음)이니, 그 조상이 일찍이 수양산(首陽山)에 숨어 굴혈 속에서 살아, 아직 나와서 세상에 쓰여진 적이 없었다.
  그는 처음 황제(黃帝) 때에 조금 채용(採用)되었으나, 성질이 굳세어 세상 일에는 그리 단련되지 못하였었다(세상에 화폐가 널리 유통되지 못하였다). 어느 날 황제가 상공(相工)을 불러 보이니, 상공이 한참 동안 들여다보고 말했다.
 "산야(山野)의 성질을 가져 쓸 만하지 못하오나, 만일 폐하가 만물을 조화(造化)하는 풀무와 망치를 써서 때를 긁고 빛을 갈면, 그 자질이 점점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원래 왕자(王者)는 사람으로 하여금 올바른 그릇이 되게 해야 하는 것이오니, 원컨대 폐하는 저 쓸모없는 구리와 함께 내버리지 마옵소서"
  이로 말미암아 그의 이름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뒤에 난리를 피하여 강(江)가의 숯화로 거리로 이사하여 거기에 눌러 살게 되었다. 그의
아버지 천(泉- 왕망이 주조한 동전)은 주(周)나라의 대제(大帝)로 나라의 부세(賦稅-세금)를 맡았었다. (주나라 때 세금을 천이라는 돈으로 받았다)   <공방의 자와 조상>

  방(方)의 위인이 밖은 둥글고 안은 모나며 때에 따라 변통을 잘 하여 한(漢) 나라에 벼슬하여 홍려경
(한의 관직 이름. 외국의 손님을 접대하는 벼슬)이 되었다. 그때 오왕(吳王)의 비가 교만하고 분수에 넘는 짓을 하여 나라의 권리를 혼자서 도맡아 부렸는데, 방은 여기에 붙어서 많은 이익을 보았다. 무제 때에는 온 천하의 경제가 말이 아니어서 나라 안의 창고가 온통 비어있었다. 임금은 이를 보고 몹시 걱정하고 방(方)을 불러 벼슬을 시켜 부민후(富民後)로 삼아, 그의 무리인 염철승(鹽鐵丞-전통적으로 소금과 철은 국가가 전매하는 사업이었으므로, 이것을 담당하는 승상이란 뜻) 근(僅)과 함께 조정에 있게 했다.(소금과 철을 국가가 전매하여 재정을 늘렸다) 이때 근(僅)은 방을 보고 항상 형님이라 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공방의 변통성>

  방(方)은 성질이 욕심 많고 더러워 염치가 없었는데, 이제 재물과 씀씀이를 도맡게 되니 본전과 이자(利子)의 경중(輕重)을 다는 법을 좋아하고, 나라를 편하게 하는 것은 반드시 질그릇, 쇠그릇을 만드는 생산(生産)의 방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백성과 더불어 한 푼 한 리의 이익이라도 다투고, 물건 값을 낮추어 곡식을 천하게 하고, 재물을 중하게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근본인 농업을 버리고 끝(사농공상의 끝-농업을 버리고 상업에만 종사하게 만들었다)을 쫓게 하여 농사(農事)에 방해를 끼쳤다.   <공방의 탐욕성>

이에 간관(諫官)들이 많이 상소(上疏)하여 논했으나 임금은 듣지 않았다. 방(方)은 또 재치 있게 권귀
(權貴-권세있고 귀한 사람)를 잘 섬겨 그들의 집에 드나들며 권세를 부리고, 한편으로는 벼슬을 팔아 올리고 내침이 그 손바닥에 있게 되므로(돈으로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공경(公卿)들이 많이 절개를 굽혀 섬기니, 곡식을 쌓고 뇌물을 거두어 문권(文券-뇌물의 목록을 적은 문서)과 증서(證書)가 산처럼 쌓여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 공방의 세도>

  그는 사람을 접하고 인물을 대함에도 불초
(不肖-못나고 어리석음)함을 묻지 않고, 비롯 시정(市井) 사람이라도 재물만 많이 가진 자면 다 함께 사귀고 통하니, 이른바 시정의 사귐이란 것이다. 때로는 혹 거리의 악소년(惡少年)들과 어울려 바둑두기와 투전하기로 일로 삼고, 자못 연락(然諾-쾌히 허락하는 것)을 좋아하므로 그 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공방(孔方)의 말 한 마디면 무게가 황금 백근만하다"하였다.   <공방의 세속적 사귐>

  원제(元帝)가 왕위에 오르자 공우(貢禹-한나라의 유명한 관리로 청렴하고 정직함)가 상서하여 아뢰기를 "방(方)이 오랫동안 극무(劇務-어려운 직책)를 맡아 보는 사이, 그는 농사가 국가의 근본임을 알지 못하고 한갓 장사치의 이(利)만을 일으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하여 공사(公私)가 다 곤궁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뇌물이 성행하고 청알(請謁-청탁하는 일)이 버젓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대저 '짐을 지고 또 타게 되면 도둑이 온다'한 것은 주역에 있는 분명한 경계입니다. 청컨대 그를 면직(免職)시켜 욕심 많고 더러운 자를 징계하옵소서" 하였다.
  그 때에 집정자(執政者) 중에 곡량
(穀粱-경제에 관하여 기록되어 있는 책)의 학문을 쌓아 정계에 진출한 이가 있었다. 그는 군자(軍資)의 장군으로 변책(邊策-변방을 막는 방책)을 세우려 하나, 방(方)의 일을 미워하는 자들이 그를 위하여 조언했다. 임금은 이들의 말을 들어서 마침내 방(方)은 조정에서 쫓겨나는 몸이 되었다.
  그가 자기 문인들에게 하는 말이,
  "내가 얼마 전에 임금님을 뵙고, 나 혼자서 온 천하의 정치(政治)를 도맡아 보아, 장차 나라의 경제가 족하고 백성의 재물이 넉넉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이제 하찮은 죄로 내버림을 당하게 되었지만, 나아가 조정에 쓰이거나 쫓겨나 버림을 받거나 나로서는 더하고 손해날 것이 없다. 다행히 나의 목숨이 실오라기처럼 끊어지지 않고, 진실로 주머니 속에 감추어져 아무말도 없이 용납되고 있다. 이제 나는 부평과 같은 행색으로 곧장 강회(江淮-장강과 회수를 말함)에 있는 별장으로 돌아가련다. 약야계(若冶溪) 위에 낚싯줄을 드리우고 고기를 낚아 술을 마시며, 때로는 바다 위의 장사꾼들과 함께 배를 타고 떠돌면서 한 평생을 마치면 그만이다. 제 아무리 천 종의 녹
(祿-많은 양의 봉록을 뜻함)과 오정(五鼎-소, 양, 돼지, 물고기, 순록을 담아 제사 지내는 다섯 개의 솥. 미식을 뜻함)의 많은 음식인들 내 어찌 그것을 부러워하여 이와 바꾸겠는가. 그러나 나의 심술이 오래되면 다시 발작할 것만 같다"

 진(晋) 나라 화교(和嬌-진나라 서평 사람. 그의 집은 부유했으나 성품이 지극이 인색하여 돈에 지독한 구두쇠였다고 함)란 사람이 있었다. 공방의 풍도를 듣고 기뻐하여 사귀어 거만(巨萬)의 재산을 모았고, 드디어 그를 사랑하여 한가지 벽(癖-버릇, 습관)을 이루고 말았다. 이것을 본 노포(魯褒-진나라 남양 사람. 배우기를 좋아하여 들은 것이 많았다. 원당후 기강이 무너지고 세상은 온통 비루한 것을 탐하자 이름을 숨기고 '전신론'을 지어 돈을 비난했다)가 논(論)을 지어 화교를 비난하고 그릇된 풍속을 바로잡기에 애썼다.

  화교의 무리 중에는 오직 완적
(삼국 시대 위나라 사람. 죽림 칠현의 한 사람으로 노장학을 좋아하고 술을 즐기고, 거문고를 타며 세상을 풍자함)만은 방달(放達-성품이 활달함)하여 속물(俗物)을 즐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방(方)의 무리와 더불어 막대를 짚고 나가 놀아 목로 술집에 이르러 문득 취하도록 마셨다. 왕이보(王夷甫)는 한번도 입으로 방(方)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없었다. 방을 가리켜 말하려면 그저 '그것'이라고 했다.

  당(唐)나라가 일어나자 유 안(劉晏)이 탁지판관(度支判官-재산을 관리하는 벼슬)이 되었는데, 나라의 씀씀이 넉넉하지 못하므로 임금께 청하여 다시 방(方)을 이용해서 나라의 씀씀이를 여유있게 하려고 했다. 그가 임금에게 이른 말은 식화지(食貨志-역사 서술에서 사회 경제 관계를 기록한 부분)에 있다.

  그러나 그 때 방(方)은 죽은 지가 이미 오래였고, 그 제자들이 사방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이들을 물색(物色)하야 나라에서 방 대신에 쓰게 되었다. 그리하여 방의 술책이 개원(開元), 천보
(天寶-당나라 현종 때의 연호) 사이에 크게 쓰여졌고, 심지어는 국가에서 조서(詔書)를 내려 방(方)에게 조의대부소부승(朝義大夫少府丞)의 벼슬을 추증(追贈)하기까지 하였다.

  남송(南宋) 신종조(神宗朝) 때에는 왕안석(王安石)이 나라 일을 맡아 보면서 여혜경(呂蕙卿)을 불러와 함께 정사를 돕게 했다. 이들이 청묘법(靑苗法-왕안석의 신법 가운데 한 가지로서, 싹이 파랄 때에 관에서 돈 백문을 대여하고 추수한 뒤에 이자 이십문을 붙여 상환하게 하던 법)을 세우니 그 때에 천하가 비로소 떠들썩하여 아주 못살게 되었다.
  소식(蘇拭)이 그 폐단을 극론
(極論-혹독하게 비난하다)하여 그들을 모조리 배척하려다가 도리어 모함에 빠져 쫓겨나 귀양가게 되었다. 이로부터 조정의 인사(人士)들이 감히 그들을 비난하지 못하였다.
  사마광(司馬光)이 정승으로 들어가자 그 법을 폐하기를 아뢰고, 소식(蘇拭)을 천거하여 높은 자리에 썼다. 이로부터 방(方)의 무리가 차츰 세력이 꺾이어 다시 강성하지 못하였다.

                                                                               (중략)
  사신(史臣)은 말한다.
  "남의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큰 이(利)를 쫓는 자를 어찌 충(忠)이라 이를 것인가. 방(方)이 올바른 법과 좋은 주인을 만나서, 나라의 은혜를 적지 않게 입었었다. 그러면 의당 국가를 위하여 이익을 일으켜 주고, 해를 덜어 주어서 임금의 은혜로운 대우에 보답했어야 했다. 그런데도 도리어 비를 도와서 나라의 권세를 한몸에 독차지해 가지고, 심지어 사사로이 당을 만들기까지 했으니, 이것은 충신이 경계 밖의 사귐이 없어야 한다는 말에 어긋나는 것이다."
  방(方)이 죽자 그 무리가 다시 남송(南宋)에 쓰여져 집정(執政)한 권신들에게 아부하여 그들은 도리어 올바른 사람들을 모함하였다. 비록 길고 짧은 이치는 저 명명(冥冥-나타나지 않아 알 수 없음)한 데 있는 것이지만, 만일 원제(元帝)가 진작 공우(貢遇)가 한 말을 받아들여서 이들을 하루 아침에 다 죽여 버렸던들 이같은 후환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만 이들을 억제하기만 해서 마침내 후세에 폐단을 끼치게 하였으니, 대저 실행보다 말이 앞서는 자는 늘 미덥지 못한 것을 걱정하기 않을 수가 없다.

 

● <공방전> 내용 정리
* 연대 : 고려 시대
* 작자 : 임춘(林椿)
* 형식 : 가전체
* 성격 :전기적, 우의적, 풍자적
* 주제 :
경세(經世)에 대한 비판
* 출전 : 동문선

<공방전> 이해하기
 
공방전은 엽전을 의인화하여 돈의 폐해를 비판한 가전체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는 인간의 삶에서 돈이 요구되어 만들어져 쓰이지만, 그 때문에 생긴 인간의 타락상을 역사적으로 살피고 있다. 작자가 사신의 말을 빌어 작품의 말미에서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이익을 좇는 자를 어찌 충(忠)이라 이를 것인가. 공방이 법을 만나고 주인을 만나 적지않은 사랑을 받았으니 응당 이익을 일으키고 해가 됨을 덜어 그 은덕에 보답해야 할 것이거늘, 권세를 도맡아 부리고 사사로운 당(黨)을 만들었으니 충신은 경외의 사귐이 없다는 것에 어그러진 자이다'라고 한 내용은 그러한 사실을 압축하게 제시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공방의 존재가 삶의 문제를 그릇되게 하므로 후환을 막으려면 그를 없애야 한다고 하였다. 작가 임춘은 무신난을 만나 겨우 도망하여 목숨을 보전하였으나, 참담한 가난 속에서 불우하게 일생을 마쳤는데, 그의 돈에 대한 폐해를 비판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