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전체의 문학사적 의의 /
석식영암
지팡이를 의인화하여 그 가계와 살아온 내력, 정시자라고 부르게 된 연유, 직책 등을 전기체로 꾸민 가전체이다. |
● <정시자전>의 줄거리
주인공인 지팡이는 석장(錫杖-중이 들고다니는 지팡이)과 같이 허식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장생불사하고 벽곡노찬( 穀露餐-곡식을 날것으로 먹음)하는 터무늬없는 신선술을 상징하는 창려장류와는 매우 거리가 있는 지팡이다.
손잡이는 정(丁)자형으로 쥐기에 편하고, 짧아서 가지기에 가볍고 힘주어 짚기에 편리하게 생긴 것이며, 나이가 많거 벼슬이 높아야만 짚는 것이지 함부로 짚으면 오히려 사람의 품위를 잃게 되는 특이한 존재이다.
인세(人世)의 덕(德:仁義禮忠孝)을 경계하는 당시 사회를 직접 비판, 분석할 수 없기 때문에 식영암은 의인화의 기법을 동원하여 당시의 사회상과 배불사상을 비판하였고, 시중드는 시자를 통하여 중생을 인도한다는 크나큰 사명감을 가지는 승려를 비유적으로 표현하였다.
고려말 불교의 전횡과 그 사회적 혼란을 그린 내용으로 부패한 불교 사회의 단면을 고발하고 승려와 지도층에 자각과 반성을 촉구하는 일종의 우화문학적인 성격을 띤다.
무엇보다도 '정시자전'의 문학적 성과는 지팡이를 의인화하여 천하를 편력하면서 성인이 되어 인간에게 교훈을 주는 데에 있으며, 종교적 사상적 면에 있어서도 노장사상을 배격하고 유불사상의 장점을 혼용, 완성하여 성불로 나아가려는 작자의 종교관이 잘 나타나 있음을 볼 수 있다.
● <정시자전> 본문 읽어보기
입동(立冬)날 새벽, 식영암(息影庵)은 암자 안에서 벽에 기대 앉은 채 졸고 있었다. 이 때, 밖에서 누군가가 뜰에 대고 절을 하며 말했다.
"새로 온 정시자(丁侍者-지팡이. '시자'는 귀인을 가까이 모시고 시중드는 사람)가 문안 드립니다."
식영암은 이상히 여기고 밖을 내다보았다. 거기에 사람이 서 있는데, 몸은 가늘고 키는 크며, 색이 검고 빛났다. 붉은 뿔은 우뚝하고 뾰족하여 마치 싸우는 소의 뿔과 같았다. 새까만 눈망울은 툭 튀어 나와서, 마치 부릅뜬 눈과 같았다. 그 사람은 기우뚱거리며 걸어오더니 우뚝 섰다.
식영암은 처음엔 놀랐으나 천천히 그를 불러 말했다.
"이리 가까이 오게. 물어 볼 것이 있네. 자네는 왜 이름을 정(丁)이라 하는가? 어디서 왔으며, 무엇하러 왔는가? 나는 평소 자네 얼굴도 모르는데 스스로 시자(侍者)라고 하니, 그건 또 어찌해서인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丁)은 깡충깡충 뛰어 앞으로 왔다. 그리고, 공손한 태도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 성인에 소의 머리를 한 분을 포희씨(包犧氏)라 하는데 그가 바로 저의 아버지입니다. 또, 뱀의 몸을 한 분을 여와라고 하는데, 그가 곧 저의 어머니입니다. 저를 낳아서 숲 속에 버리고 기르지 않았습니다. 저는 서리와 우박을 맞을 때 마치 말라서 죽는 듯하였습니다. 그러나, 비바람을 만나면 다시 살아나는 듯하였습니다. 이처럼 한서(寒暑-추위와 더위. 여기에서는 세월)를 천백 번 겪은 뒤 성인(成人)이 되었습니다.
여러 대를 지나 진(晉)나라 세상에 이르러 범씨의 가신(家臣-정승의 집안을 맡아 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 때, 비로소 칠신지술(漆身之術-복수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위장함)을 배웠습니다. 당(唐)나라 시대에 와서는 조 노(趙老)의 문인이 되어 거기에서 철취(鐵嘴)라는 호를 받았습니다. 그 뒤 저는 정도(定陶) 땅에서 놀았습니다. 이 때, 정 삼랑(丁三郞)을 길에서 만났습니다. 그는 저를 한참 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 생김새를 보니 위로는 가로 그어져 있고, 아래로는 내리 그어져 있으니, 내 성(姓)인 정(丁)자와 꼭 같이 생겼네, 내 성을 자네에게 주겠네.'
저는 이 말을 듣고 성을 정 이라 하였는데, 앞으로도 고치지 않으려 합니다. 저의 직책은 남들을 모시고 도와 주는 데에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저를 부리기만 해서 항상 천하고 고달프기만 합니다. 그러나, 저를 나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감히 저를 부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진심으로 붙들어 모시는 분은 얼마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제가 원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이제는 돌아가 의지할 곳도 없게 되었습니다. 나라 안을 돌아다니면서 토우(土偶-흙으로 만든 사람)에게 웃음거리가 된 지 오래 되었습니다. 어제, 하느님께서 저의 기구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저에게 명하시되,
'너를 화산(花山)의 시자(侍者)로 삼을 것이니, 그 곳에 가서 직책을 받들고, 스승을 오직 공손히 섬기라.'
고 하셨습니다. 저는 하느님의 명을 받들고 기뻐서 외다리로 뛰어 온 것입니다. 원컨대, 장로(長老-경험이나 덕이 많고 나이 든 사람의 존칭)께서는 용납해 주십시오."
이 말을 듣고 식영암은 또 이렇게 말하였다.
"아, 후덕스런 일이로구나. 정상좌(丁上座-정시자를 높여서 부르는 말)는 옛 성인의 유체(遺體-타고난 몸)로구나."
(이하 생략)
● <정시자전> 내용 정리
* 연대 : 고려 말엽
* 작자 : 석식영암
* 형식 : 가전체
* 주제 : 사람은 자신을 깨닫고 도(道)를 행해야 한다
* 출전 : 동문선
● <정시자전> 이해하기
정시자전은 성군(聖君)이 없어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고, 임금과 그들을 들러싼 문신들은 오히려 인재를 외면하고 득세하는 한심한 세상을 풍자한 작품이다.
정시자야말로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 등 모든 미덕을 갖춘 인재였으나, 사람을 만나지 못하여 떠돌아다니면서 의지할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작자는 인재가 등용되지 못하는 비리의 세태를 함축성 있게 비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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