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전체의 문학사적 의의 /
이 곡
죽부인은 대로 엮은 통발 모양의 것으로 여름에 이것을 안고 있으면 바람이 잘 통하여 시원하므로 남자가 안고 자는 것이므로, '부인'이라 부른다. 그러나 여기서는 대나무와 소나무의 절개를 주제로 하여 사대부의 절개를 강조한 것이다. |
● <죽부인전>의 줄거리
죽부인은 이름이 빙(憑)이고, 위빈에 사는 은사운(왕대)의 딸이다. 그 선대에 문적과 가까이 하여 사관이 되고 특히 문인과 친교가 있었다.
서두에는 죽부인의 소개와 그의 선조가 음악에 조예가 깊어 당시에 발탁되어 우대를 받았음을 말해주고 있다. 바로 악기에 사용된 제구(製具)가 죽부인이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퉁소처럼 당시 사회에서 우대를 받아온 것이다.
진나라가 학정함에 창랑의 후손은 숨어 지냈고, 한나라 때의 문도는 저생(楮生-종이)과 같이 놀았다.
주나라때의 간(竿-장대)은 태공과 더불어 위빈에서 낚시질하며 곡직을 충직하게 간하였다. 총각인 의남이 음사(淫辭)를 지어 죽부인을 희롱하였으나 정숙한 그는 절개로써 물리치고 드디어 부모의 권고에 따라 송대부와 혼인하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송공은 신선이 되어 돌아오지 않으므로 위풍(衛風)을 때때로 노래하였다. 그러다가 청분산(靑盆山-화분)에 집을 옮겨가 고갈병이 나서 치료하지 못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여 늦도록 절개를 지키며 살았다.
● <죽부인전> 본문 읽어보기
주인공의 신분 및 가계
부인의 성은 죽(竹)이요, 이름은 빙(憑)이다. 위빈(渭濱)사람 운(왕대)의 딸이다. 그의 가계는 창랑씨(蒼 氏)로부터 시작한다. 조상이 음률을 잘 해득하였으므로, 황제(黃帝)가 그를 뽑아서 음악의 일을 맡아 다스리게 했다. 우(虞)나라 때의 소(簫-피리) 역시 그 후손이다.
처음 창랑은 곤륜산 남쪽으로부터 동쪽으로 옮겨 와서, 복희씨(伏羲氏) 때에 위씨(韋氏)와 함께 문적(문서와 장부)에 관한 일을 보아 큰 공을 세웠다. (옛날에는 대나무에 글을 기록했다) 그래서, 자손 대대로 모두 사관(史官)의 자리를 맡아 왔다.
진(秦)나라는 포악한 정사를 하였다. 이 사(李斯)의 계략을 받아들여 모든 책들을 불사르며 선비들을 묻어 죽였다. (진시황 때의 분서갱유를 이름) 이렇게 되자 창랑의 자손들은 점점 한미해졌다.
한(漢)나라 때에는 채 륜(蔡倫-종이를 만든 사람)의 문객 저생(楮生-종이)이 글을 배워, 붓을 가지고 때로 죽씨와 함께 놀았다. 그러나, 그 위인이 경박해서 남 헐뜯기를 좋아했다. 죽씨의 그 강직한 모습을 싫어하여 몰래 헐뜯다가, 마침내 죽씨의 소임까지 빼앗아 갔다. (글을 기록하는 것이 대나무에서 종이로 옮겨갔다)
주나라 때는 간(竿-장대)이 있었다. 그도 역시 죽씨의 후손이다. 그는 강태공과 함께 위빈에서 낚시질을 했다. 어느날 태공은 낚시에 쓸 갈고리를 만들었다. 이것을 본 간이 태공에게 말했다.
"내가 들으니 큰 낚시는 갈고리가 없다고 합니다. 낚시의 크고 작은 것은 굽고 곧은 데가 있습니다. 곧은 낚시는 가히 나라를 낚을 것이요, 굽은 낚시는 겨우 물고기를 낚는 데 지나지 못할 것입니다."
태공은 간의 말을 옳게 여기고 그 말대로 좇기로 했다. 뒤에 과연 태공은 문왕의 스승이 되어 마침내 제(濟) 나라에 봉해지기까지 했다. 이에 태공은 간(장대)이 어질다고 임금에게 천거하여 위빈을 식읍으로 삼게 했다.
이것이 바로 죽씨와 위빈이 관계를 맺게 된 유래이다.
지금도 죽씨의 자손은 수없이 많이 퍼져 있다. 이를테면 임,어,군,정이 곧 그들이다. 이 자손 중에서 양주로 옮겨 간 자들이 있다. 이들은 조, 탕이라고 한다. 또 오랑캐 땅으로 들어간 자는 봉이라 한다.(이들 모두 대나무의 종류)
죽씨에게는 대개 문과 무의 두 줄기가 있다. 대대로 변, 궤, 생, 우처럼 대체로 예악(음악)에 소용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또는 활 쏘고 물고기를 잡는 데 쓰는 작은 도구에 이르기까지 모두 전적(典籍-서적)에 실려 있어 대의 마디마디를 볼 수 있다. 그 중에서 오직 감만은 성질이 몹시 둔했다. 속이 꽉 막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죽어 버렸다. 운의 대에 이르러서 숨어 살면서 벼슬하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주인공의 성품 및 행적
죽씨의 자손에 당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형과 함께 욕심 없이 살았다. 특히 왕 자유(王子猷)와 친하게 지냈다. 어느 날 자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루도 그대 없이는 살 수 없소."
이로부터 그의 호를 차군(此君)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자유는 단정한 사람으로서 벗을 사귀는데도 반드시 단정한 사람과 사귀었다. 그러므로, 그의 사람됨을 알 만하다. 당은 익모(益母)의 딸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다. 죽부인(竹夫人)은 바로 그 딸이다. 처녀 때에 그는 정숙한 자태를 지녔다. 이웃에 사는 의남(宜男)이란 자가 음란한 노래를 지어 마음을 떠보았지만, 부인은 화를 내며,
"남녀가 비록 다르지만 그 절개는 하나밖에 없다. 한 번 남에게 절개를 꺾이게 되면 어찌 다시 세상에 설 수 있겠는가?"
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의남은 부끄러워서 달아났으니, 어찌 소나 끄는 사람들이 엿볼 수 있는 것이랴.
송 대부가 예를 갖추어 혼인하기를 청하였다. 이 때 그 부모는 말하였다.
"송 공은 참으로 군자다. 그의 지조와 행동을 보니 우리와 짝이 될 만하구나."
마침내, 그와 결혼하였다. 이로부터 부인의 성질은 날로 더욱 굳고 두터워 흑 일을 분별함에 임하여서도 그 민첩하고 빠름이 마치 칼날로 쪼개는 것과 같았다. 비록, 매선(梅仙-매화)의 유신(有信)이나 이씨(李氏-오얏)의 무언(無言)일지라도 불고하였거늘, 하물며 그의 이러한 성질을 늙은 귤이나 살구 열매 따위에 비교할 수 있으랴!
혹, 안개 낀 아침이나, 달 밝은 저녁이면 바람을 시로 읊고 비를 휘파람으로 즐겼나니, 그 말쑥한 태도를 무엇으로 형용하랴. 호사자(好事者-일을 벌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남몰래 그 얼굴을 그려 전하면서 보배로 삼았다. 그 중에서도 문여가(文與可)와 소자첨(蘇子瞻)이 더욱 이를 좋아했다.
송 공은 부인보다 나이가 십 팔 세나 위였다. 늦게 신선이 되어 곡성산(穀城山)에서 놀다가 돌이 되어 다시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그 후, 부인은 혼자 살면서 왕왕 시경(詩經)의 위풍(衛風)을 노래하였다. 자연히 마음이 흔들려 혼자 지탱해 나갈 수 없었다.
주인공의 행적에 대한 포상
게다가 부인의 성품은 술 마시기를 좋아하였다. 어느 해인가 오월 십삼일 청분산(靑盆山-화분)으로 집을 옮겨 살다가 술에 취하여 고갈병(枯渴病-물이 말라 죽는 병)에 걸려 끝내 고치지 못했다. 병을 얻은 후부터 항상 남에게 의지해 살았다. 부인은 만절(晩節-만년의 절조)이 더욱 굳었으므로 향리의 칭찬이 그치지 않았다. 또 삼방 절도사 유균(惟菌-버섯)의 부인과도 성이 같았다. 그녀의 행실은 임금에게까지 알려져서 절부(節婦)의 직함을 받았다.
사씨(史氏)가 말하기를
"죽씨(竹氏)의 조상이 크게 상세(上世-오랜 옛날)하여 공이 있었고, 그 묘예(苗裔-여러 대에 걸친 먼 후손)들이 다 재능이 있어 절(節-절개)을 항(抗)하여 세상에 일컬음이 되었으니, 부인의 어짐이 마땅하다. 아, 이미 군자를 짝하고 남의 의지함이 되고도 마침내 후사(後嗣-대를 잇는 아들)가 없었으니 천도(天道)가 무지(無知)하다 함이 어찌 헛말이랴."
● <죽부인전> 내용 정리
* 작자 : 이 곡
* 갈래 : 가전체
* 성격 : 전기적, 풍자적, 우의적
* 제제 : 대나무
* 주제 : 죽부인의 절개
● <죽부인전> 이해하기
작자는 성리학의 영향으로 삼강오륜을 역설, 의를 바탕으로 한 충, 인에 입각한 효를 논하여 충효론을 주장하였다.
이 작품은 당시 음란한 궁중과 타락한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점차 절부(節婦-절개 곧은 부인)가 드물어져감을 한탄해서 지은 것이다. 음란한 노래의 사회적 병폐를 지양하는 뜻에서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죽(竹-節婦)을 대상으로 하여 부인의 높은 절개를 표하여 반증한 것이며, 구성과정이 변(왕대)의 음률을 통하여 조정의 전악관의 악서에서 퉁소의 후손을 두고 있는 것은 순탄한 권선적인 완전구성이다.
첫째 단락은 죽의 이름과 성을, 둘째 단락은 죽부인의 선계와 공덕을 찬양하였고, 대나무의 지조와 성품을 강조하였으며, 송공과 혼인하게 되는 과정을 그렸다. 셋째 단락은 사씨(史氏)의 평을 빌려 자기 의사를 강조한 내용으로 사물 하나하나를 연관성 있고 조리있게 표현하였다.
당시의 고려는 국운이 기울어져 궁궐이나 여염의 기강이 풀려서 남녀 관계가 극히 문란하였다. 이 퇴폐적인 사회에 경종을 울리기 위하여 일종의 열녀전을 <죽부인전>이라 칭하여 세상에 내어놓으니, 죽부인을 당시의 이상적인 여인상으로 부각시키려는 작자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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