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민족 영토

역사연구가 정형진의 고대문화 새로 읽기 <3> 칠성님이 곰신앙을 약화시켰

지식창고지기 2009. 8. 7. 08:09

역사연구가 정형진의 고대문화 새로 읽기 <3> 칠성님이 곰신앙을 약화시켰다
우주생명관을 지닌 환웅족의 '칠성신앙'이 주도적 신앙의 지위에 올라
하늘님 환인이 사는 북두칠성 섬기던 공공족의 환웅이 부계적 질서를 꾸려
여섯빛깔 문화이야기

 
  충북 영동 천태산 망탑봉 윷판 알터
앞글(2회)에 이어 이제 단군의 어머니인 웅녀의 곰신앙이 왜 사라졌을까에 대답할 차례이다.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환웅이 도래했을 때 곰과 호랑이의 경쟁에서 곰이 외부에서 온 환웅세력과 연합하고 호랑이는 밀려난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곰신앙은 사라지고 한반도에 호랑이와 산신신앙이 만연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바로 한민족 초기 공동체의 구성원을 이해하는 것이다. 단군신화의 구조를 보면 분명히 주연은 환웅이고 조연은 웅녀와 호랑이 여인이다. 환웅이 하늘세계(다른 곳)에서 이주해와 주도권을 쥐고 상황을 만들어 간다. 그가 신시를 열고 신정을 펼치기 시작하자, 굴에서 살던 곰과 호랑이가 그에게 와 사람 되기를 빈다. 환웅이 쑥과 마늘을 주면서 일정기간 수련할 것을 요구하는데, 곰은 그 조건을 충족시켜 사람이 되고 호랑이는 실패한다. 사람이 된 웅녀는 환웅에게 신인(神人)의 아이를 가질 수 있게 해 달라고 한다. 이에 환웅이 응해서 단군이 태어났다.

여기서 우리는 문화 전파의 속성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문화는 높은 곳에서 낮은 데로 물이 흐르듯이 에너지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단군신화의 구조를 보면 환웅이 가지고 온 문화가 그곳에 있던 곰이나 호랑이 부족이 가지고 있던 문화보다 에너지가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즉 현지의 주민들이 환웅이 가지고 있던 우주생명관이나 세상을 다스리는 방식을 흠모했던 것이다. 환웅이 가지고 온 문화는 이미 부계사회로 이행된 단계였으며, 곰이나 호랑이 부족은 아직 모계적 전통을 다 벗어나지 못한 단계였다.

 
  청원군 아득이 마을의 돌판 문양. 북두칠성이 선명하다.
이러한 정황을 이해하고 보면 왜 곰신앙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고 종국에는 소멸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환웅이 가지고 온 신앙체계가 웅녀가 가지고 있던 그것을 약화시켰던 것이다. 에너지가 강한 집단의 종교가 그들보다 약한 집단의 신앙을 약화시키는 것이 인류사의 보편적 현상이었다. 삼국시기에 불교가 들어오자 우리 고유 신앙이 약화되었던 현상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환웅이 가지고 온 신앙은 어떤 것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칠성신앙이다. 필자가 환웅족이라고 주장하는 공공족은 중원에 있을 때부터 하늘을 관찰하고 그 변화를 기록했다. 중국 문화사에서 하늘의 뜻을 최초로 기록한 집단이 공공족이다. 중국학자 왕대유에 따르면 '典'자의 원형은 네모난 단(壇)에 나무기둥을 세운 형태인 공(工)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즉 전(典)자는 공공족이 자신들의 제단에서 하늘의 뜻을 표시하던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소도[工]와 관련 있는 공공(共工)이란 이름에서 칠성신앙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공공은 '공(工)을 받드는(共)'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즉 신성한 제단(소도)에서 하늘을 섬기던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하늘의 중심에 바로 하늘님(환인)이 사시는데 그곳이 북두칠성이다.

동북아시아 선도의 뿌리도 공공족과 무관하지 않다. 무(巫)자의 소전(小篆), 즉 진나라 때의 글자를 보면, 땅의 중심에서 북극성(북두칠성)을 연결하는 척목(尺木)을 상형한 것이 공(工)자인 것을 알 수 있다. 소전에 보이는 무자는 공(工)자를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이 서 있는 모습이다. 이 글자는 하늘과 땅 사이의 통로(척목) 아래에서 무사가 무술을 행하면서 신명계와 소통하고 있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도교가 무속에서 천계의 중앙으로 생각하던 북두칠성관념을 계승하여 칠성신앙을 성립시켰다면(정재서, '한국도교의 기원과 역사'의 설명) 중국 도교의 뿌리도 바로 공공족의 우주생명관과 연결된다.

이와 같은 우주생명관을 가진 공공족 즉 환웅족의 신앙이 곰신앙을 누르고 주도적인 신앙이 됨으로써 웅녀의 곰신앙은 차차 그 힘을 잃게 된다. 일부 학자들은 칠성신앙은 도교 신앙 중에서도 가장 오랜 연원을 지니고 있다고 하면서 우리의 칠성신앙을 도교와 연결한다. 그러나 앞에서 설명한 대로 칠성신앙은 우리고유 신앙이다.

칠성신앙은 공공족이 중원에 있을 때부터 신앙하던 것으로 삼국시대에 도교가 한반도로 유입되기 이전부터 있었다. 그 흔적이 고인돌이나 암각화에 나타나 있다. 북한에서 기원전 25세기경에 새워졌다(함주군 지석리 고인돌)고 주장하는 고인돌 덮개돌에도 칠성이 새겨져 있으며, 충북 청원군 아득이 마을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옆에 묻혀있던 돌판에도 칠성이 새겨져 있다. 또한 청동기 시대로 추정되는 암각화에는 윷판모양의 알터가 많이 발견되고 있는데 이 또한 칠성의 운행을 형상화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천년왕국 수시아나에서 온 환웅' 저자
  입력: 2009.04.30 20:46
ⓒ 국제신문(www.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