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발굴 자료로만 보면 삼족오는 황하 중류지역의 앙소문화에서 출발한다. 다음으로는 산동지역의 대문구문화에서 세 발 달린 맹금류 도기가 보인다. 상대에는 봉황 모습을 갖춘 형태로 변형된 삼족조(三足鳥)가 보이며, 서주시대에도 청동으로 만든 삼족조가 보인다. 춘추시대에도 많지는 않지만 삼족조가 만들어진 것은 확인된다.
그러다 전국시대가 되면 다시 삼족오가 와당(瓦當·기와의 막새)에 등장한다. 진나라 이후에는 세 발 달린 까마귀가 여러 점 발견되고 있으며, '산해경'에 나오는 서왕모가 신선사상과 결합하면서는 서왕모의 심부름을 하는 새로운 삼족오가 등장한다. 신선사상에서는 삼족오를 보통 삼청조(三靑鳥)라고 하며, 꼬리가 아홉 개 달린 구미호와 함께 서왕모의 사자로 나온다.
위의 자료들을 보면 삼족오 혹은 삼족조에 대한 관념은 이미 신석기부터 진한에 이르는 시기에 중국대륙에 면면히 이어져 오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동북지방에서 이들보다 이르거나 혹은 비슷한 시기에 삼족오 혹은 삼족조가 없었다면 고구려의 삼족오는 문화 전파와 교류의 산물로 이해해야 한다.
고구려 오회분 4호묘 벽화 속의 삼족오. | |
그렇다면 중원에서는 사라지는 삼족오가 고구려에서 그렇게 오랫동안 그려지고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들어가 20세기 천황의 즉위식의례에까지 생명력을 얻고 있는 배경은 무엇일까? 단순히 중국에서 부활한 삼족오가 고구려로 전파되고 그것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일까?
필자는 삼족오가 고구려에서 힘을 얻어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배경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삼족오가 고구려와 일본에서 오랫동안 생명력을 얻었던 것은 북방 초원루트를 통해 전파된 태양신의 사자로서 까마귀에 대한 생각 때문으로 보인다. 그것은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삼족오가 음양론과 결합되어 양(陽, 3수)의 상징으로서 '태양 속의 삼족오'(日中三足烏)와 다른 문화전통을 보이기 때문이다.
까마귀는 페르시아에서 발생해 로마에서 전성기를 맞았던 미트라교의 '태양신'의 길 안내자 역할을 했다. 그리고 아폴론을 수행한 아리스테나스도 '까마귀의 모습으로' 수행했다고 한다. 이런 전통은 주몽을 수행했던 오이(烏伊), 온조를 수행했던 오간(烏干)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태양신의 사자로서 까마귀는 일본으로 건너가 웅야(구마노)에서 대화국(야마토국)을 침공하러 갈 때, 태양신인 천조대신(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이 보낸 세발달린 까마귀인 팔지오(八咫烏)는 신무천왕(神武天皇)을 안내한다. 이렇게 해서 일본에서 삼족오는 천황가의 수호새로 자리잡는다. 일본 황실의전에는 까마귀 장대가 등장하는데, '속일본기' 문무기(文武紀)에 따르면 그 전범은 701년 신년 축하식에서 마련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삼족오문화는 중원에서 동북으로 전파된 문화와 서쪽에서 초원을 타고 동으로 이동한 문화가 고구려에서 만나 화려한 꽃을 피우고 다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날아갔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따라서 삼족오를 고구려의 전유물처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문화전파의 산물보다는 호우총에서 나온 궁륭을 나타낸 기호가 고구려의 문장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천년왕국 수시아나에서 온 환웅'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