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 삼국(위) - 등애/동소/관구검/곽회

지식창고지기 2009. 8. 9. 00:13

등애 鄧艾


197 ~ 264


삼국시대 위(魏)나라사람.

자는 사재(士載). 의양(義陽,하남성) 출신.

사마의(司馬懿)에 의해 등용되어 상서랑(尙書郞)의 벼슬을 지냈다.


이때 운하의 굴착을 건의하고 『제하론(濟河論)』을 지었다.

정시 2년(241) 촉한(蜀漢)의 군대를 물리친 공으로 관내후(關內候)에 봉해졌다.


이때부터 각종 전공을 세워 벼슬이 진서장군(鎭西將軍)에 이르고 등후(鄧候)에 봉해졌다.

경원(景元) 4년(263) 사마소(司馬昭)의 명을 받고 촉한을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후에 모반하였다는 누명을 쓰고 살해되었다.

 

 

동소 董昭 

? ~ ?


위나라의 중신.

제음현 정도 사람으로 자는 공인(公仁).

과거에 급제한 후 원소와 장양의 종사관이 되었으나, 황제의 환도를 듣고 달려와 조근하고 칙사로서 조조에게 파견되었다.

조조가 득세한 뒤 장사 벼슬에 있으면서 허도로 천도할 것을 진언하고 조조를 위공에 이어서 위왕으로 승진시킬 것을 추천했으며, 구석을 가하라고 권유하였다.

관우가 형주에서 출병하여 번성을 에워쌌을 때, 구원병을 보내기에 앞서 대대적으로 선전하여, 지키는 조인의 사기를 돋우고 관우의 심경을 어지럽게 하는 심리작전을 건의하였다. 

조조가 죽은 뒤에 조비, 조예 등을 받들어 크게 공헌했다.

벼슬이 태복(太僕)에 이르렀으며, 병으로 죽었다.

 

 

관구검 ?丘儉


?~255.

삼국시대 위(魏)나라의 무장(武將).

자는 중공(仲恭). 하동(河東) 원시[聞喜] 출신으로 명제(明帝)의 신임을 얻어 유주자사(幽州刺史)가 되었다.

237년 요동(遼東)지방으로 진출하여 오환족(烏丸族)을 물리친 그는 공손씨(公孫氏)를 평정하기 위해 나섰으나 독립세력인 공손연(公孫淵)에게 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듬해인 238년 재출정에 나서 사마의(司馬懿)와 함께 공손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다. 

 

244년 고구려 정벌의 명령을 받은 그는 고구려 군대를 쳐부수고 지금의 랴오닝 성[遼寧省] 지안[輯安] 부근에 있던 고구려의 수도 환도성(丸都城)을 함락시켰다.

이듬해 현토 태수 왕기에게 명령하여 고구려를 다시 공략하게 했으며, 왕기의 군대는 지금의 함흥평야를 지나 간도(間島)에까지 진격했다.

관구검은 환도 땅에 기공비(紀功碑)를 세우고 개선했는데, 20세기초 이 비석의 조각이 지안 현의 반스링[板石嶺]에서 발견되었다.

그뒤 남방의 오(吳)나라와 대치전에 들어갔다.

255년 명제가 죽은 뒤 제위를 둘러싸고 사마씨와 일대 격전이 벌어졌으며 그는 양저우[揚州] 자사 문흠(文欽)과 함께 병사를 일으켰지만 결국 실패하여 살해당하고 말았다.

 

 

곽회 郭淮

? ~ 253 


위의 용장.

태원 양곡 사람으로 자는 백제(伯濟).

한중 출병에 종군하였다가 조홍이 장합의 패전 책임을 물어 합하려는 것을 적극 만류하였다. 

사마의의 부장으로 출전하여 제갈량과 맞서 싸우다가 많은 괴로움을 당하였다.

뒤에 사마사를 도와 철롱산에서 강유와 맞섰을 때, 진태를 시켜 강왕 미당을 속여서 끌어내어 크게 파했으나, 빈 활만 가지고 달리는 강유를 급히 쫓아가며 쏜 화살을 강유가 손으로 잡아 되쏜 것이 이마에 맞아 진에 돌아와 죽었다.

관직은 거기장군(車騎將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