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민족 영토

[강원도민일보] 발해문화 한민족 기층문화로 조명해야

지식창고지기 2009. 8. 23. 10:27

“발해문화 한민족 기층문화로 조명 해야”
속초시·본사 주최 ‘발해의 꿈 프로젝트’ 심포지엄
2009년 07월 11일 (토) 최훈
   
속초 발해역사관 개관 기념 발해와 강원도 심포지엄이 10일 속초 시립박물관 세미나실에서 김중석 강원도민일보사장, 채용생 속초시장, 김성근 속초시의회 의장과 관계자, 시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속초/ 서영
속초시와 강원도민일보사는 국내 최초로 발해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하기 위해 건립한 발해역사관 개관을 기념해 10일 오후 속초시립박물관 세미나실에서 ‘제1회 발해의 꿈 프로젝트’의 하나로 ‘발해와 강원도’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했다.

국토해양부, 강원도, 고구려발해학회, 동북아역사재단이 후원한 이날 심포지엄은 한규철 고구려발해학회장(부산 경성대 사학과 교수)를 사회 및 좌장으로, 발해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발해사 전반에 대한 국내외 관련 전문가들이 참석해 주제발표와 지정토론을 맡아 발해역사 복원의 당위성 및 활성화 방안 등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이날 주제발표자 및 토론자들은 발해와 강원도는 연관성이 없다는 기존의 인식을 바로 잡고 발해와 강원도의 깊은 역사성 및 영토적 배경 등에 대해 새롭게 조명함과 동시에 발해사를 우리민족사로 확고하게 정립하고 발해문화를 우리민족의 기층문화로 더욱 활발히 조명하자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 제1발제 - 중국의 발해유적 정비 현황과 강원도의 역할

타 지역과 객관적 연구 교류 필요

중국은 동북지역 학자 중심 발해사 연구

   
▲ 이병건
경기 동원대 실내 건축과 교수
(고구려발해학회이사)
현재 중국에서는 발해유적에 관해 ‘중점관리지역’을 설정하고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한 채 대대적인 유적 정비사업을 벌이고 있다.

발해유적의 개발과 활용은 중국 중앙 및 지방정부의 총제적인 관광 자원화 정책에 맞추어 앞으로 더 다양하게 추진될 것으로 예견된다.

지금 중국의 발해사 연구는 동북지역의 연구자들이 주축이 되고 있는데, 우리나라 연구자들이 북경대나 남경대 등 수준 높은 다른 지역의 연구자들과 연계해 보다 객관적인 연구 교류를 가질 필요가 있다.

발해는 당시에 영주도, 압록도, 거란도, 일본도, 신라도(道)라는 5개 주요교통로를 가지고 있었다. 삼국사기에 인용된 가탐(당나라 정치가)의 ‘고금군국지’에는 “발해 동경 용원부에서 신라 정천군으로 가려면 반드시 남해부를 경유해야 하고 , 정천군에서 동경 용원부에 이르려면 39개 역을 지나야 한다”고 기록돼 있다. 신라의 정천군은 지금의 함경남도 덕원이며, 책성부는 발해시기 동경 용원부로 지금의 길림성 훈춘시 일대고, 남경 남해부는 함경남도 북청 일대로 비정된다.

발해유적 분포로 볼 때 신라도의 노선은 동경 용원부를 떠나 두만강을 건너 북청을 거쳐 신라의 정천군에 다다른 뒤 동해안을 따라 남행해 원산, 통천, 고성, 속초를 지나 계속 남행해 경주에 이르렀을 것이다.

현재 속초항을 통해 러시아와 중국 훈춘으로 통하는 뱃길이 열려있다.

지난 6월 속초시와 훈춘시는 자매결연을 체결하고 우호협력을 약속했다.

막혀있는 북한지역을 넘어 발해의 세번째 수도인 동경 용원부가 있던 훈춘 지역과 그 너머 상경 용천부가 있던 흑룡강성 영안시까지 우리는 왕래할 수 있게 됐다.

국내 최초로 건립된 ‘발해역사관’ 개관을 계기로 많은 국민들이 ‘신 신라도’를 따라 발해유적을 탐방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제2발제-발해의 대외 교류와 강원도

강원은 발해·신라·일본 협력 거점

발해, 도내 항구 이용 일본과 해상교류

   
▲ 구난희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발해의 대외교류를 알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단서는 5경이 설치되고 이를 연결하는 5개의 교통로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신당서’에는 “용원의 동남쪽 연해는 일본도(道)이고 남해는 신라도이다. 압록은 조공도이고 장령은 영주도이며 부여는 거란도이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발해사가 강원도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은 5경 중 동경과 남경, 교통로로 보자면 신라도와 일본도라 할 수 있다.

신당서에서는 발해의 남쪽 경계를 ‘니하(泥河)’로 기록하고 있는 데 니하를 어디로 보느냐에 따라 발해의 영역 범위는 달라질 수 있다.

정약용 선생은 ‘아방강역고’에서 ‘니하’를 강릉 북쪽의 이천수(현재의 연곡천)로 보고 양양 이북이 발해의 땅이었다가 756년경 신라 영토가 되었다고 기록했다. 발해의 남쪽 경계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를 찾지 못하고 있지만 종합해 보면 발해의 남쪽 경계는 소극적으로는 함흥, 적극적으로는 양양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추론은 가능하다.

발해의 신라도의 이용 범위는 어디까지 확장해 볼 수 있을까?

정약용 선생은 발해 남경을 함흥으로 비정하고 있으므로 발해로부터 신라 경계(강릉)에 도착한 후에는 바닷길을 이용해 경주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했다.

발해의 해양교류가 진행되는 가운데 강원도내 많은 항구들이 거점으로 이용되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훈춘으로부터 출발해 신라도를 넘어서서 속초와 양양을 거쳐 일본으로 이어지는 일본도와 긴밀하게 연계되는 항로를 설정해 볼 수 있다.

즉 강원도는 신라도(道)와 일본도를 연계하고 발해, 신라, 일본의 공존과 협력을 이끄는 거점적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 제3발제 - 발해 음식문화와 현대적 응용

발해인 콩·개고기 즐겨 먹었다


러 니콜라예프카 성터서 개뼈 출토

   
▲ 윤태환 속초 동우대 교수
발해인의 음식은 현재까지 알려진 바가 매우 드물고 관련 국가의 식습관에 대한 고찰을 통해 추정하는 정도의 연구가 조금 있을 뿐이다.

주로 중국의 길림성, 흑룡강성, 요녕성에 거주하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중국학자들의 개인적인 소견이나 고문헌 고찰에 근거한 연구이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로서 주요 구성민족은 소수의 고구려 유민과 다수의 말갈족 등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콩을 주재료로 한 음식과 아욱 등의 야생채소를 이용한 음식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개고기 및 돼지고기를 이용한 맥적 등을 즐겨 먹었다. 그리고 발해에는 뽕나무가 다량으로 자생하였는데 뽕나무 줄기, 어린 순, 뽕잎, 열매인 오디 등을 식용했고, 또한 누에도 식용으로 이용했다.

고고학 자료를 살펴보면 발해인들은 개고기를 즐겨 먹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 원동의 니콜라예프카 2호 성터 한곳에서 개뼈 860점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246마리의 개뼈에 해당하며 가축뼈 출토 총수의 25.8%를 차지한다고 한다.

현재 중국의 조선족 사람들은 개를 식용으로 하고 있으며 한반도의 주민들도 주식은 아니지만 보양식으로 개를 식용하고 있음을 볼 때 신빙성이 큰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연밥과 연뿌리는 발해인의 중요한 음식중 하나 였는데 현재 흑룡강성의 임구 호림이란 방정 동녕 등지에는 연화촌, 연꽃늪과 같은 마을 이름이 많을 정도이다.

현재의 중국 동북부 지역과 한반도, 그리고 일본열도의 식생활을 고찰해 보면 발해의 식습관과 식재료 사용은 이들 지역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하지만 관련된 문헌이 상당히 부족한 상황이며 발해와 관련된 국가의 식습관을 통해 발해의 식재료 및 식습관을 추정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이에 대한 고문헌 탐구와 확실한 고증이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 제4발제 - 발해사의 문화자원론적 활용 방안

남북국시대 민족사 체험도시 조성


발해문화축제 개최·영랑동 화랑체험장 연계

   
▲ 장정룡 강릉원주대 교수
발해와 강원도 동해안지역의 관계를 구체화 한 학자는 다산 정약용이다.

그는 ‘아방강역고’에서 신라와 발해가 남쪽 ‘니하’를 경계로 했으며 ‘니하’는 강릉의 북쪽 니천수(지금의 연곡천)로 보았다.

또 신라 자비왕 때 하슬라 사람들이 니하성을 쌓았으며 양양이북은 당나라 무후 말년(704년)부터 들어왔으며 당 현종 천보(742∼755)이후 철관이남의 땅이 다시 신라의 소유가 되었다 기록했다.

정약용이‘아방강역고’에서 양양이북의 땅이 발해에 들어온 시기를 무후 말년이라고 한 것은 713년 직전이며, 현종 천보이후는 발해가 수도를 중경현덕부에서 상경룡천부로 옮기기 전(755년)에 해당한다.

당 현종 천보년간에 후기신라가 북쪽지방의 영역을 큰 규모로 확대한 것은 748년에 해당하므로, 천보이후라 한 것은 748년 이후를 의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정약용이 발해가 양양이북의 땅을 차지했다고 한 시기는 713년부터 748년경까지의 사이에 해당한다.

현재 속초에서 러시아 연해주와 중국 훈춘을 잇는 해양실크로드가 연결되고 있는 데 그 곳은 발해땅이다.

그곳으로 강원도와 일본, 러시아, 중국의 인적·물적 네트워킹이 가능하다.

속초시에 발해역사체험장이 들어서야할 학문적 근거와 영토적 배경은 충분하며, 동일한 고고학적 유물이 동해안에서 출토되는 점도 연계성을 말해주고 남는다

따라서 속초시와 발해유적의 시공을 초월한 만남은 필연일 수 있다.

속초시는 발해역사관 개관을 시발로 향후 발해사박물관 건립, 발해연구센터 등을 설립하고 발해문화축제를 개최해 영랑호 신라화랑체험장과 연계한다면 새로운 차원의 흥미로운 만남을 통해 남북국시대 민족사 체험거점도시에서 더 나아가 발해역사 메카로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아울러 속초시를 발해역사문화교육특구로 지정하는 방안도 검토될 수 있다.



■지정 토론
   

“도·발해 연계 시간 갖고 진행”

△송기호 서울대 교수

그동안 발해의 역사를 중국사라고 얘기해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고구려와 발해에 대한 역사관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발해의 영토가 강원도 양양까지 였다는 주장이 있지만 통일신라 역시 땅을 뺏길 정도의 급박한 상황이 아니었던 만큼 발해의 영토를 강원도와 연계시키려는 것은 다소 거리를 두고 얘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범선 복원 관광자원화”

△엄광열 환동해북방산업연구원장

강원도는 신라와 일본의 교역로를 할 수 있었던 위치라고 생각되며 발해사의 재조명을 위해 속초항과 관련된 부분 역시 새롭게 항만과 해양사를 연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속초항 인근에 과거 발해가 교통로를 확보했던 범선을 복원해서 관광자원화 하는 등의 노력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발해의 독창성 찾아내야”

△정영진 중국 연변대 발해사연구소장

지난해 부터 북한지역과 공동발굴을 추진하면서 느낀 점은 북한지역은 경제개발이 늦는 맞큼 역사유적은 보존은 잘됐다는 점을 발견했다. 중국에는 북한만큼 발해의 고분이 잘보존 된 것을 찾을 수가 없다. 보다 활발하게 발굴이 이뤄질 경우 공동등재가 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발해의 독창적인 무엇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주변국 사료 통해 음식문화 연구”

△권병철 동우대교수

음식과 민족은 시공을 초월하는 밀접한 관련성을 띠고 있다. 사료에 기초한 발해음식의 조리법이 발견되지 않는 한 발해음식의 원형을 재현한다는 것도 추정에 불과할 것이다. 음식에 있어 발해의 민족적 계승의 분명한 패턴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발해에 영향을 끼친 주변국의 사료 등을 통해 앞으로의 연구가 진행돼야 할 것이다.



“발해 명칭 새로운 접근 필요”

△김창석 강원대교수

음식재료에 대해서는 부족하지만 사료가 있는데 돼지나 다시마, 붕어 등에 대한 언급이 없다. 발해라는 명칭 역시 추정할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는 만큼 음차로 이해를 한 것으로 판단된다. ‘발’이라는 단어는 신라 등에서는 들판이라는 뜻으로 이해가 가능하지만 고구려에서는 들판이라는 뜻의 단어를 ‘노’나 ‘나’를 쓴 것으로 알고 있다. 이에 대한 새로운 접근도 필요하다.



“주민 자발적 참여 유도해야”

△엄찬호 강원대 연구교수

강원도와 발해, 억지로 연계시킬 필요는 없다. 발해와 관련된 행사도 주민이 자발적으로 나서야 지역행사로 정착될 수 있다. 역사를 재조명하고 속초와의 연계성을 찾아 정립을 한다면 가능성은 충분하다. 북한지역에서의 발해의 흔적을 찾고 이를 실향민의 도시인 속초와 연결시키면 상승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정리/최 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