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가마쿠라鎌倉 > 명칭 - 고케닌, 덴지쿠

지식창고지기 2009. 10. 20. 11:43

고케닌

御家人


일본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부터 에도 시대[江戶時代]에 걸쳐 쇼군[將軍]과 주종관계에 있었던 무사의 총칭.


처음에 고케닌은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와 일반무사 사이의 개인적 쌍무관계(雙務關係)에서 비롯된 사적인 경향이 강했으나, 요리토모의 동국정권(東國政權)이 전국적 규모의 무사정권인 가마쿠라 바쿠후로 발전하면서 하나의 제도로서 고정되었다.

가마쿠라 고케닌이 되기 위해서는 현지의 자기 영지를 개간해 소유하고 있는 영주가 묘부[名簿: 성명을 기록한 증서]를 쇼군에게 바치고 쇼군을 알현하여 충성을 맹서한 뒤, 쇼군으로부터 영지의 소유권을 인정받는 공문서(구다시부미[下文])를 받아야만 했다.

가마쿠라 고케닌은 평상시에는 교토[京都]에서 황실의 경비나 쇼군 저택의 경비를 맡았으며 쇼군의 저택이나 신사(神社), 사찰 등에 공사가 있을 때는 노역을 해야 했다.

또한 전시(戰時)에는 전쟁에 출정하는 군역(軍役)이 요구되었다.

 

위와 같은 부역을 담당할 만큼의 영지를 소유하는 것이 고케닌의 필수조건이었다.

그러나 서국(西國) 고케닌 중에는 지방장관인 슈고[守護]가 연명(連名) 문서(교묘[交名])를 쇼군에게 바치는 것만으로 고케닌이 된 경우도 있었으며, 장원영주 등의 보임장(補任狀)만으로 고케닌이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가마쿠라 시대 초기에는 적자(嫡子)만 고케닌이 될 수 있었으나, 중기 이후에는 독립한 서자도 부담을 감당할 능력이 있으면 고케닌으로 될 수 있었다.

가마쿠라 시대에는 분할상속이 원칙이었기 때문에 고케닌의 영지는 차츰 영세화되어 중기 이후에 이들의 생활은 궁핍해졌다.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에도 고케닌이라는 말은 남아 있었으나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에도 시대에는 쇼군을 직접 만나볼 수 없는 바쿠후의 신하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덴지쿠

天些

('인도'를 일컫는 옛 일본어)


일본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1192~1333]에 성행했던 3가지 불교건축 양식 가운데 하나. 당당한 규모와 세부의 다양성이 인상적이다.

이 양식의 가장 독특하고 뚜렷한 특징은 각재(角材)로 처마를 정교하게 떠받치고 있는 점이다. 

이 양식의 도입은 일본 나라[奈良] 불교의 부활이 낳은 우연한 부산물이었던 것 같다.

도다이 사[東大寺]를 재건할 때 가장 광범위하게 쓰였으며, 도다이 사의 남대문(南大門)이 가장 인상적인 건조물이다.

이 양식을 쓰기로 한 사람은 도다이 사 재건 작업을 감독했던 정토종(淨土宗) 비구승인 조겐[重源]이었다고 한다.

이 양식은 그 특성상 일본인 취향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1205년 조겐이 죽은 뒤로는 인기가 급속히 떨어져 점차 쓰이지 않게 되었다.

13세기말에 이르면 좀더 일본인의 취향에 맞는 양식에 완전히 흡수되었고, 14세기에는 원래 이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을 복원할 때를 제외하고는 거의 잊혀진 양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