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가마쿠라鎌倉 > 기타 - 겐무 중흥, 잇키

지식창고지기 2009. 10. 20. 11:45

겐무 중흥

建武 中興


겐무 신정(新政)이라고도 함.

1333년 일본에서 가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가 무너진 뒤 고다이고 천황[後醍?天皇]의 주도 아래 전개된 천황친정체제(天皇親政體制).


조큐[承久]의 난 이후 가마쿠라 바쿠후는 점차 강대해져 마침내 황위계승문제를 비롯한 조정 대사에 간섭하기에 이르렀으며 이에 대해 황실은 일찍부터 이를 타도하려 했다.

1318년 즉위한 고다이고 천황은 1321년 인세이[院政]를 폐하였으며 기록소(記錄所)를 부활시켜 천황친정을 실시함과 동시에 바쿠후 타도를 꾀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1331년에 타도 계획이 발각되자 천황은 오키[隱岐]로 유배당했다.

그러나 이듬해에 모리나가 친왕[護良親王]과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가 군사를 일으킴으로써 바쿠후 타도 운동이 전개되자 1333년 천황은 오키를 탈출했다.

한편 무장(武將)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가 교토에 있던 로쿠하라단다이[六波羅探題: 조큐의 난 뒤 설치된 가마쿠라 바쿠후의 조정 감시기관]를 토벌하고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가 가마쿠라를 함락시키자 가마쿠라 바쿠후는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천황은 같은 해 6월 교토로 돌아와 인세이와 간파쿠[關白]를 폐하고 천황친정체제를 수립했다. 

이듬해인 1334년 1월에 연호를 겐무라 했으며 이리하여 겐무 중흥이 성립되게 되었다.

천황은 논공행상을 하는 한편 기록소를 다시 부활시키고 신설기관을 설치해 공가(公家)와 무가(武家)의 인재를 두루 등용시키는 한편 지방행정제도를 쇄신하기 위해 고쿠시[國司], 슈고[守護]를 두는 등 대대적인 변혁을 꾀했다.


그러나 급격한 정치변혁으로 인해 무사들의 불만이 높아지고 과세의 증가로 농민의 원성이 잦아지자, 이 틈을 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무사, 특히 호족 영주층의 무사를 규합하여 신정부 반대의 태도를 분명히 하기에 이르렀으며 결국 겐무 정권은 붕괴되고 말았다.

 

 

잇키

一揆


일본의 중세·근세 사회에서 볼 수 있던 무사·농민 들의 고유한 결합 및 행동 양식. 본래는 일치협력한다는 뜻이지만, 가마쿠라 바쿠후[鎌倉幕府]가 멸망한 후 계속되는 정치적·사회적 혼란에 대처하고자 중소 무사층이 일심동체로 취한 자신들의 집단행동을 잇키라고 불렀다.

가마쿠라 시대의 도[黨]가 혈연적 집단이었던 것과는 달리, 잇키는 지연적 결합요소가 강했다.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에 들어와서는 농촌의 토착 무사나 도시 하층민의 폭동을 의미하게 되었으며, 구니잇키[國一揆]·잇코잇키[一向一揆]·도쿠세이잇키 [德政一揆:쓰치잇키라고도 함] 등의 구별이 있다.

에도 시대[江戶時代]에는 바쿠후나 한[藩]의 영주의 권력에 반항한 햐쿠쇼잇키[百姓一揆]가 여러 형태와 요구를 갖고 전개되었으며, 도시 빈민층의 반항은 주로 우치코와시 [打毁:관아나 부잣집 등을 때려부수고 약탈하는 소동] 형태를 취했다. 메이지 시대 초기의 잇키는 보통 농민소요라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