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아시카가(무로마치) 바쿠후, 집권과 성립

지식창고지기 2009. 10. 20. 11:52

아시카가(무로마치) 바쿠후


아시카가 다카우지 足利尊氏 1338~58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足利義詮 1358~67

아시카가 요시미쓰 足利義滿 1368~94

아시카가 요시모치 足利義持 1394~1423

아시카가 요시카즈 足利義量 1423~25

아시카가 요시노리 足利義敎 1429~41

아시카가 요시카쓰 足利義勝 1442~43

아시카가 요시마사 足利義政 1449~73

아시카가 요시히사 足利義尙 1473~89

아시카가 요시타네 足利義稙 1490~93

아시카가 요시즈미 足利義澄 1494~1508

아시카가 요시타네(두번째)  1508~21

아시카가 요시하루 足利義晴 1521~46

아시카가 요시테루 足利義輝 1546~65

아시카가 요시히데 足利義榮 1568

아시카가 요시아키 足利義昭 1568~73

 

 

아시카가[足利]씨의 집권과 무로마치[室町] 바쿠후의 성립


1335년 7월 호죠 다카토키의 아들 도키유키[時行]가 시나노[長野縣]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호죠씨의 부흥을 들고 일어났는데, 그 지방의 호족들 마저 합세하여 그들은 가마쿠라로 공격해 들어갔다.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의 동생 다다요시[足利直義]는 그들에 대항해 싸웠으나 패배 하였으므로 가마쿠라는 다시금 호죠씨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 소식은 교토의 조정을 당황케 하였으나, 다카우지는 좋은기회라 여기고, 자신이 정이대장군이 되어 도키유키를 토벌하겠다는 청을 올렸으나, 고다이고 천황은 이를 거부하였다.


그리고 8월 1일 나리나가친왕을 정이대장군에 이명하여 호죠씨 토벌을 명하였다.

이에 다카우지는 스스로 정동장군[征東將軍]이라 칭하고 8월 2일 가마쿠라로 향하였다.

가마쿠라로 향하던 다카우지는 도중에 동생인 다다요시의 군대와 합세하여 18일 사가미강 에서 도키유키의 대군을 격파하여 가마쿠라를 탈환하였다.

허나 가마쿠라로 입성한 다카우지는 노골적으로 조정에 배반의 태도를 보내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다카우지의 토벌을 위해 닛타요시사다[新田義貞],오주의 기타바타케등으로 하여금 가마쿠라를 덮쳐 3면에서 공격토록 하였으나, 오히려 요시사다의 군대가 하코네의 다케노시다[竹下]에서 패하여 역으로 쫓겨들어왔다.

그런데 다카우지는 그대로 군대를 몰아 교토로 진군함으로써 교토를 폭풍전야로 만들었다.

고다이고 천황은 에이산산으로 도망쳐 사카모토에 행재소[行在所]를 설치하였다.


1월 10일 다카우지의 군대는 야마자키에서 요시사다의 군대를 무너뜨리고 교토로 입성하였다.

하지만 오주에서 남하한 기타바타케의 군대가 가마쿠라를 점령하여 교토 탈환을 위해 다카우지의 군대와 맞붙어 패퇴시킴으로써 다카우지를 구주로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구주에서 세력을 만회한 다카우지는 1336년 4월 3일 다시금 교토로의 진군을시작했다.

더구나 구주의 쇼니[少貳], 오토모[大友]등 강력한 무장들이 다카우지에 가세 함으로써 그 세력은 상당해졌다.


1336년 7월 12일 미나도가와강을 수륙 양면에서 밀고들어간 다카우지군에 요시사다와 교토에서 내려온 마사시게가 대항하였으나, 육로에서 공격해 들어온 다카우지의 동생 다다요시군마저 합세하게되자 패하여 미나도가와강 북쪽의 민가에서 마사시게와 그의 일족은 자결하였고, 요시사다군은 무너져 다카우지의 교토탈환을 허용하였다.


교토를 장악한 다카우지는 고곤상황[光嚴上皇]의 동생 도모히토친왕[豊仁親王]을 세워 고메이천황[光明天皇]으로 삼았다.


1336년 11월 7일 17조의 건무식목[建武式目]을 발표하엿고, 1338년 8월 비로소 세이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라는 관직을 정식으로 받고, 바쿠후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그후 그의 후손인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때에 이르러 교토의 무로마치에 바쿠후를 설치하므로 이른바 아시카가씨의 무로마치바쿠후가 성립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