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무로마치室町 > 남북조 시대

지식창고지기 2009. 10. 20. 11:56

남북조의 대립


교토를 장악한 다카우지는 동생 다다요시로[足利直義] 하여금 고다이고 천황을 가산원[花山院]에 유폐시키고, 엄중감시케 하였다.

하지만 1336년 12월 21일밤 고다이고천황[後醍?天皇]은 몇몇 중신들과 함께 여자로 변장 하여 가산원을 탈출하는데 성공하여 요시노산[吉野山]으로 탈출하여 요시노 정권을 수립하게 되니, 이를 남조[南朝]라 부른다.

그리고, 그에 반하여 지묘원 계통의 고곤상황[光嚴上皇]과 고묘천황의 조정을 북조[北朝] 일컷게 되는 것이다.


한편, 남조의 세력은 북조에 비해 상당히 적은 편이었으며, 다카우지의 거센공격에 무용

뛰어난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와 다카우지와 대등한 문벌과 지위를 갖춘 유일한 사람인 요시사다마저 잃게된다.

요시사다가 죽은후 다카우지는 세이이대장군[征夷大將軍]에 오르면서 명실공히 정치적 실권을 거머쥐게 된다.


고다이고천황[後醍?天皇]은 초라하게 요시노산에 들어온지 3년 째인 1339년 8월 16일 병상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천황의 죽음은 남조로서는 상당한 타격이었다.

무너져가는 남조의 부흥을 위하여 치카후사와 마사시게의 아들 구스노키 마사쓰라 [楠木正行]등이 군사를 일으켜 북조의 호소카와.야마나[山名]의 연합군을 격파함으로써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하지만 1348년 마사쓰라[楠木正行]는 시죠나와테에서의 전투에서 엄청난 숫적인 열세를 극복치 못하고 동생 마사토키[楠木正時]와 함께 자결하였다.


한편 남조의 세력이 급격히 약화되자 이번엔 아시카가씨의 내분이 머리를 들었다.

그것은 다카우지의 동생 다다요시[足利直義]와 다카우지의 중신 모로나오와의 관계악화가 발단이었다.

다카우지는 평소 정무를 대부분 다다요시에 일임하였으나, 이것이 모로나오에게는 달가울리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카우지는 모로나오에 손을 들어주어 다다요시를 정무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당시 행정권,재판권을 소유하고 있던 다다요시와 다카우지의 대립은 북조의 혼란을 가져왔으며, 이로인해 남조는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한편 다카우지의 처우에 다다요시는 남조와 화해하였으며, 다카우지군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이에 다카우지와 다다요시의 전면전이 발생하려 하였으나, 남조의 배후세력을 의식한 다카우지가 남조측에 항복을 하였고, 남조측은 교섭끝에 다음과 같은 조건을 들어 다카우지의 항복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1. 다이카쿠사 계통의 정통성을 인정한다.

2. 모든 것을 건무의 중흥 당시로 환원한다.

3. 북조측의 신기[神器]를 남조에 인도한다.


한편 다카우지가 항복하자 남조의 고무라카미 천황은 다카우지에게 다다요시를 토벌하라는

명을 내렸고, 다카우지는 몇차례의 전투끝에 다다요시를 제압하였다.

그뒤 1358년 54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다카우지가 죽은후 그의 장남 요시아키라[足利義詮]가  제2대 쇼군의 자리에 오르니, 나이 29세였다.

그는 이미 반제법[半濟法]이라는 법령을 공포한적이 있었는데, 그가 제정한 반제법이란 것은 오미를 비롯한 8개국에 군한하여 조정과 신사 및 사원이 소유하고 있는 장원의 연공 가운데, 그 절반을 무사들의 군량미로 징수할 수 있게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전국의 슈고[守護,일본 가마쿠라[鎌倉]·아시카가[足利] 시대의 지방관]들의 세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슈고의 권력이 강해지자 그 임국[任國, 임명을 받아 부임한 나라]은 자신이 지배하는 대명의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이는 단순히 무사를 지도. 감독하는것만이 아니라, 그들을 직접 통치할 수 있는 영주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남북조의 통일


아시카가 요시아키라[足利義詮]가 1367년에 사망하자 그 뒤를이어 아시카가 요시미쓰 [足利義滿]가 10세의 어린나이로 쇼군의 자리에 올랐다.

요시아키라가 사망하기 이전 어린 요시미쓰의 후견인으로 서국의 요리유키를 집사로 삼았다.

요리유키는 24세때 가계를 이은 후 여러나라를 다니며 수호로서의 세력을 확보하여 호소카와 일족의 핵심인물이 되었다.

요리유키는 1367년 12월 정치적 표면에 나서면서 바쿠후의 주요 인물로 구성된 평정중 [評定衆]의 우두머리가 되어 관령[管領, 쇼군을 보좌하며 정무를 총괄하는 직위]이라 불리게 되었다.


한편 요리유키의 세력이 확대되자 일부 슈고다이묘들은 1379년 2월 미노의 도키씨, 엣츄의 시마씨 등이 서로 연합하여 요시미쓰에게 요리유키 퇴진압력을 넣었다.

요시미쓰는 할 수 없이 요리유키를 아와로 보내고 그 뒤를 시바 요시마사를 새로운 관령으로 임명하였다.


1378년 요시미쓰[足利義滿]가 21세가 되었을때 남조의 세력을 점점 약해졌다.

반면 바쿠후의 세력은 더욱 강화되어 교토의 무로마치에는 대 저택이 완성되기도 하였으며, 요시미쓰는 바쿠후의 권력을 최고에 이르게 하기위해 전국의 내노라하는 슈고다이묘[守護大名]들의 세력을 꺾어 놓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이같은 그의 생각은 도키, 야마나, 오우치 등의 강력한 다이묘등을 궤멸시키는 상황으로 전개되었고, 1390년에는 미노,오하리,이세의 슈고인 도키씨를 타도하였고, 전국의 1/6을 소유하고 있던 야나마[山名]씨를 토벌하여 11개국의 영토를 2개국으로 줄여놓았다.

이로써 전국에 바쿠후의 권위를 확립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