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센고쿠 시대 - 미카타가하라[三方原] 전투

지식창고지기 2009. 10. 26. 11:21

미카타가하라[三方原] 전투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은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있어 매우 힘겨운 상대였다.

그리고 신겐 또한 노부나가에 이어 교토 진출의 야망을 품고 그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자였다.

한편 아네가와(姉川)강의 전투로 병사의 태반을 잃은 아사이[淺井],아사쿠라[朝倉]는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고, 거기에 시고꾸에서 올라온 미요시와 혼간사의 승병들도

결탁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세력만으로는 노부나가에 대항하기 어려웠으므로 가이의 다케다 신겐에게

동맹을 요청하였고, 신겐이 이 요청을 받아들임으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 대

아사이-아사쿠라-다케다의 연합군이 형성되었다.


당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영토는 56만석으로 동원가능한 병력수는 5~6천 이었다.

때문에 노부나가에 원병을 요청하였으나 가와찌, 세쯔, 야마토, 오미, 에치젠 등 사방을

적으로 둔 노부나가가 보낼 수 있는 원군은 3,000정도가 고작이었다.


1572년 12월 19일 노부나가가 파견한 사꾸마 모리마사, 히라떼 히로히데[平手汎秀],

다끼가와 가즈마스의 세장수에게 3,000명의 병력을 보내었다.

그리고 22일, 실제병력 2만 7천의 다케다군이 덴류강을 건너 미카타가하라[三方原]에다다랐다.

이에야스는,

우익에 사카이 다다쓰구, 다키가와 가즈마스, 히라떼 히로히데, 사쿠마 노부모리를

좌익에 오가사와라 나가다다, 마쓰다이라 이에다다, 혼다 다다까스, 이시까와 가즈마사

를 세우고 그 한가운데 자신의 본진을 세웠다.

학익진 이었다.


학익진은 신겐의 어린진 보다 더욱 많은 병사의 수를 요구하는데, 1/3의 병력으로

당시 최강이라 불리던 다케다 신겐의 군대와 대치한 것이다.


하지만 전투가 벌어진지 채 2시간이 지나기도 전, 신겐이 이끄는 고슈의 군대는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명장들을 베어 들판 전체에 흩어 놓았다.

이에야스는 흙먼지 속에서 연신 공격을 외쳤으나, 오꾸보 다다요, 사카키바라 야스마사가

간신히 이에야스에게 다가오는 적들을 막아낼 뿐이었다.

이에야스는 이 전투에서 병력의 태반을 잃고, 노다성으로 퇴각하여 수성에 치중하였다.


비록 거의 전 병력을 잃었다 하나, 이에야쓰 또한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무장이기에,

신겐의 군대를 근 열흘째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버틸 여력은 없었다.

그 무렵 노다성에서는 밤마다 피리소리가 들려왔다.

전쟁에 지친 자들 속에서 들려오는 피리소리는 지친 병사들의 감정을 움직이기에

충분하여서 신겐은 며칠간이나 그 소리를 감상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어김없이 피리소리를 감상하던 신겐에게 몇 방의 총성이 들려왔다.

저격을 당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신중에 신중을 더하던 신겐의 상경은 중지되었고, 며칠후 가케무샤를 이용하여

무사히 본국으로 철수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