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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미래의 주거 문화 아파트 사업

지식창고지기 2009. 12. 7. 10:04


해외공사의 눈 부신 실적은 국내 부문에 그대로
반영되어 국내 사업에서도 놀라운 실적을 올리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미래형
주거 문화, 아파트 사업이다.

 

  대형 공사가 터지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때를 기다리지 않고 터진다.
최근 2 ~ 3 년 내  " H "  건설은 주체 할 수 없을 정도의공사 물량을 받아 냈다.
중동 지역에서만 최근 2 ~ 3 년 사이에 20 억 불 이상의 수주고를 올렸다.
이는  그 이전 2 ~ 3 년의 공사 주주 물량의 50 배 이상에 해당 하는 물량이다.
여기에 왕 회장의 탁월한 경영능력이  엿 보인다. 

 

정상적인 기업이라면, 급작스러운 기업규모의 팽창은,  다른 원인을 제쳐 두고
라도 우선, 자금 문제가 있다.  자금 조달의 한계는 자신도 모르게 도산의 길로
빠져 들기 마련이다.

 

특히 " H " 건설과 같이 많은 열악한 계열 기업을 거느리고 있는 그릅으로서는
계열 기업간 자금의 흐름이 막혀  숨통을 조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동안
힘들게 끌어 온 자동차 업종도 그렇고, 최근에 손을 댄 조선 업종도 지금은 돈을
먹는 하마다.  막대한  자금을 투입 해야만 하고, 자금 회수에는  상당한 기간이
필요한  것이다.

 

1975 년 전까지  " H " 건설의 해외 수주고 중 가장 큰 공사는 3 천 3 백 만 불
짜리 인도 네시아의 도로 공사가 고작이다. 그 나마,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의
공사이기 때문에 공사 진행 속도가 지지부진하고, 하자가 많이 발생하여 큰
이익을  기대 할 수 없는 공사이다.

 

1975 년 4 월 " H " 건설이 중동에 진출한 이래,  세월은 숨 가쁨의 연속이었다.
1975 년 6 월,  이란, 반달아바스 동원 숙소 공사를 시발 점으로,  10월에는
1억 4 천 만불 바레인 아랍 수리 조선소 공사,  12 월에는 사우디 1억 9 천 만불짜리
해군기지 해상공사, 그 다음 해인 1976 년 6월에는 9 억 5 천 만불 짜리  저
유명한  쥬베일 산업항 공사,  3 개월 후인 9 월에는  3억 7 천 만불, 동원 숙소
육상기지 공사, 다음 해 5 월 초  2 억 7 천 만불, 라스 알 가 항만 공사,  2 개월
후인 7 월,  아씨르 전력화 공사 착공, 등 아무도 상상 할 수 없는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 왔던 것이다.

 

 

 

 

1976 년 11 월  " H " 건설은 국내 처음으로  건설 수출 10 억불 탑을  수령하고
12 월 에는 총 매출액 1천 3 백 50 억 원을 기록하였다. 대 그릅으로  성장 할 수
있는 토대를 이룩 한 것이다.  해외공사의 눈 부신 실적은 국내 부문에 그대로
반영되어 국내 사업에서도 놀라운 실적을 올리게 되었다. 그 중 하나가 미래형
주거 문화,  아파트 사업이다.

 

하루 종일 관공서를 헤집고 다니던 6 월 어느 날 오후,  주간 업무 보고서 작성을
준비하고 있는 정 부장에게 테렉스 문자판 때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 왔다.
대외 업무 수행에 귀와 눈 역할을 하는 테렉스실을 정 부장은 가시거리에
두어 항상 테렉스 내용을 누구보다 먼저 확인 한다.

 

 

테렉스 내용은 압구정동에 건립하는 아파트를 해외에 근무하는 사원에게 우선
분양 한다는 내용이다. 35 평형, 48 평형, 65 평형, 등 ,  평 당 금액 약 40 만원, 
입주  시기는  1977 년 - 1978 년.

 

 

 

 

 

직원들 사이에는  분양에 대한 찬반 양론이  제기 되었다.

 

" 무조건 분양을 받는 것이 유리 할 거야!."


" 아니야, 아파트는 아직 일러! "


" 알아 보니까, 일반 분양이 않되니까, 직원들에게 돌리는 거라고 하던데."


" 값도 일반 주택보다 배 이상 더 비싸지 않아?, 변두리 조금만 나가면 대지 50 평
  건평 30 평짜리  단독 주택을  5 백만원이면 떡을 친다고 하던데, .. .."


" 압구 정동은 변두리 중에 변두리라고 하던데, . . . ."

 

직원들간에는 아직 아파트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부동산에 대한 신념도 없을 때다.
생소한 아파트에 천만원 단위의 자금을 투입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정 부장은 대학시절 모 교수로부터 들은  지대론( 地代論) 강의 내용을  떠 올렸다.

 

" 산업 사회에서의 땅이란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입니다. 산업 사회에 있어서의 모든
  재화는 생명의 한계가 있고 시간이 갈 수록 그 가치는 줄어 듭니다   제품이나
  생산품은 물론이고, 화폐까지도  이자의 개념을 확대 해석하면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는  유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산업사회에서의  땅값, 즉, 지대만은 산업
  활동에 편입되어 있는 한 그 가치는 시간이 지날 수록 증대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일반 재화에 적용되는 공식은 땅에 대해서는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

 

 

정 부장은 즉시 본사 주택 사업부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이런 경우, 해외 부서를
통 할 필요가 없다. 무엇보다  실무 부서에서 가장  정확한  정보를 입수 할  수 있는
것이다.

 

" 한 부장!,  안녕 하시요?,  제다 정 부장이요! "

 

" 오!, 정 대감!, 웬 일이시요?, 전화를 다 주고? "

 

" 요즈음 매우 바쁘다면서?, 도시개발회사 만들어서 사장 되는 것 아니요? "

 

" 원, 세상에, 내가 사장되면 정대감을 부사장으로 모실까? "

 

" 그건 그렇고, 아파트 분양에 대한 전문을 받았는데,  스토리가 어떻게 되는거요?"

 

" 어!, 그거, 눈 딱 감고 사 두구료, 앞으로 전망이 좋을 테니까.'

 

그 날 한 부장으로부터 전화기를 통하여 귀속 말로 얻어 들은 내용에 정부장은
또 한번  왕 회장의 결단에 놀라움을 금 할 길이 없었다.

 

중동에서 벌어 들이는 외화는 실로 막대한 금액이었다. 매달 미화 1 억 불에
해당하는 외화가 국내로 송금 되었다. 당시 재무부 고위 관리가 1 억불 재정
차관을 얻기 위하여 유롭 금융시장을 2 개월이나 헤메고 다녔어도 끝내 성공
하지 못 하던 시절이다.

 

 

왕 회장은 그 때부터 사업의 다각화와 세계화를 위한 큰 그림을 그리기 시작
했다. 이미 자동차와 조선업은 궤도에 올라 해외 수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주 업종인 건설과 자동차와 조선업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하여 각 종 부품을
생산하는 10 여개의 자 회사를 만들어 수직 계열화에 성공 하였다.

 

 

1977 년과 1978 년은 왕 회장 개인적으로도 전성기를 예고하는 전초 시기였다.
1977 년 4 월 13 대 전경련 회장에 추대되어 금 후 4 대를 연임하며 경제 대통령
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릅 전체 매출이 1 조 3 천 3 백 억원에 달 하여 국민 총생산
( GNP )의 7 %에 달 하는 실적을 올렸다. 1976년도 매출액 4 천억원에 비하면 무려
3 배 이상의 성장을 기록 한 것이다.

 

1977 년 8 월 미 경제 전문지 " 포츈"은 한국 기업으로는 최초로 " H " 그릅을 1976 년도
세계 500 대 기업 중 278 위에  올려 놓았고, 이듬 해에는 다시 98 위로 올려 놓았다가
또 그 다음  해에는 다시 78 위로 ( 78 년 매출 , 36 억 불 ) 상향 조정 하였다. 1978 년
5 월  국세청에서도 1977 년도 납세액 141 억원 을 납부한  " H "  건설이 납세 순위 1 위
라고 발표 하였다. 
 
뿐 만 아니다,  인천에 있는 제철회사를 인수하고, 서소문에 있는 서울 고등 학교
부지를 동시에 인수 하였다. 재계에서는 두개 의 큰 덩어리를 한번에 인수 한
왕 회장의 자금력에 대하여  경외로움 마저 감추지 못 했다.

 

 

 

1976 년 3 월 왕 회장은 사내 주택사업부를 한국 도시개발 주식회사로 독립
시켰다. 본격적인 주택 사업을 하기 위해서다.  국민 소득이 증가하면 편리한
주거공간과 자동차의 소유욕이 강 해 지리라는 예측을 한 것이다. 그가 자동차
산업에도 심혈을 기울인 이유다. 그의 예측은  오랜 세월 동안 보기 좋게 적중 하였다.

 

 

 

 

 

주택사업의 새로운 모델을 아파트형 주거 형태로 정 한 배경에는 그의 남 다른
혜안이 있었다. 한국같은 인구 밀집 지역에서는 더 이상 만성적인 주택 부족을
단독 주택으로 해결 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개인 소득의 증가는 곧 지가의
상승을 동반한다. 따라서 공간 활용을 극대화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주거공간은 지상으로  " 넓게 " 가   아닌   " 높게"  로  가야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아파트는 1962 년 대한 주택공사가 설립되자 마자 마포에
짓기 시작하여 1964년에 완공을 본 마포 아파트가  효시다. 6 층 짜리 건물
10 개동에 총 642 세대분이 고작이다. 아파트형 주거문화를 도출하기에는
조족지 혈( 鳥足之血)이다.

 

1970 년대 중반  " H " 건설이 강남 압구정동 일대 넓은  배밭을 성토하여
5 천 여 세대의 아파트 단지를 조성한 것은 실로 우리나라 아파트 문화를
일으킨 기폭제가 되었다.  당시의 주거문화는 단독 주택이다. 그 때까지만
해도 고층 아파트 형  주거 문화가 유행처럼 도래 할 것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정 부장은 즉시 직원 회의를 소집하였다. 아파트 분양에 대한 분분한 의견들을 잠
재우기 위해서다.

 

" 아파트 분양 공고에 대한 의견들을 듣고 싶은데,  어떤가? "


" . . . . . . . "

 

한참만에  경리과장이 입을 연다. 전공이 경리인 만큼 자금에 초점을 맞춘다.

 

" 우선, 돈이 만만치 않은데요?,  집 값이 천만원이 넘고, 아파트라면, 아직. . .생소
  하거든요. ."

 

" 자재 과장은 어떤가? "

 

" 새 집으로 이사한지 얼마 않되서, . . . . . 별로, . . . . ."

 

" 업무 과장은? "

 

" 우선 집에다 연락해서 현장 답사를 하라고  할겁니다."

 

그 다음에는 별로 의견 제시하는 사람이 없다.

 

" 내 의견으로는 분양 신청하는 것이 옳은 답인 것 같애. 앞으로 땅 값, 집값, 모두
  널 뛰듯 할테니, 무리를 해서라도 집 장만 해두는 것이 바른 길인 것 같거든.
  업무과장 말 대로 일차 현장 답사를 먼저 해 봐야 하겠지만, "

 

전체 분위기는 부정적이다. 현장 답사도 않된 상태에서 강요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렇나 정 부장은 분양 신청하는 쪽을 택 했다. 그리고 이 결심은 훗 날 황금 알을
낳는 거위가 되었고, 자녀들의 해외 유학 자금까지 충당 할 수 있는 황금 거위가
된 것이다. 종부세도 없었고, 양도세도 없었던 시절 이야기다. 미래에 대한 확고한
신념만이 필요했던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