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중국의 실용주의자, 작은 거인 / 덩샤오핑 (鄧小平)

지식창고지기 2009. 12. 27. 10:11

중국의 실용주의자, 작은 거인 / 덩샤오핑 (鄧小平)

1904. 8. 22 중국 쓰촨 성[四川省]~1997. 2. 19 베이징[北京].
덩샤오핑 /덩샤오핑

1970년대말과 1980년대에 중국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었다. 그는 많은 정통 공산주의 이론을 포기하고 중국 경제에 자유기업의 요소를 혼합시키고자 했다. 프랑스에서의 유학기간(1921~24)중 공산주의 운동에 적극 참가했으며, 그후 소련 유학(1925~26)을 마치고 귀국하여 장시[江西] 소비에트에서 지도적인 정치·군사 조직가가 되었다. 장시 소비에트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중국 서남지방에 세운 공산당의 독자적인 지배지역이었다. 덩은 중국공산당의 장정(長征:1934~35)에 참여하여 중국 서북부의 새로운 근거지로 이동했다. 제2차 세계대전중 중국과 일본의 전쟁기간 내내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에서 정치위원으로 있었다. 공산당이 패권을 차지한 뒤인 1952년 총리가 되었다. 1954년 중국공산당 총서기, 1955년 정치국 위원이 되었다.

1950년대 중반부터 덩은 대외정책과 국내정치 면에서 모두 중요한 정책결정자였다. 덩은 류사오치[劉少奇] 같은 실용주의적인 지도자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 이들 실용주의적인 지도자들은 중국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물질적인 보상제도를 채택하고 기술·경영 면에서 숙련된 엘리트를 양성하자고 주장했다. 그결과 덩은 점점 마오쩌둥과 갈등을 빚게 되었다. 덩은 1960년대 후반 마오쩌둥을 추종하는 급진파가 일으킨 문화대혁명 과정에서 공격을 받고 1967~69년에 당과 행정부에서 차지하고 있던 고위직을 박탈당한 채 대중 앞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그러나 1973년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의 후원으로 복권되어 총리가 되었으며, 1975년에는 당 중앙위원회의 부주석, 정치국 위원 총참모장이 되었다. 저우언라이가 죽기 몇 달 전부터 정부를 효율적으로 이끌어간 덩은 저우언라이의 후계자로 널리 알려졌으나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죽자 마오쩌둥의 추종자였던 4인방(四人幇)에 의해 다시 권좌에서 밀려났다.

1976년 마오쩌둥이 죽고 4인방이 숙청된 후 비로소 그해 9월 마오쩌둥의 후계자인 화궈펑[華國鋒]의 동의를 얻어 복직되었다. 1977년 7월경 덩은 이미 고위직을 회복했으며 당과 정부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화궈펑과 권력투쟁을 벌였다. 덩이 화궈펑보다 노련한 정치력과 폭넓은 지지층을 확보하고 있었으므로 화궈펑은 1980~81년에 총리직과 주석직을 내놓아야만 했고 이들 자리는 덩샤오핑 휘하의 인물들에게 돌아갔다. 자오쯔양[趙紫陽]이 정부 총리가 되었고 후야오방[胡耀邦]이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되었는데 두 사람 다 덩의 지도노선을 따랐다. 이때부터 덩은 중국의 경제발전을 위해 자신의 독자적인 정책을 실행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합의·타협·설득 등의 방법을 써서 중국의 정치·경제생활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친 중대한 개혁을 도모했다.

그는 경제 운영에 있어서 지방분권적인 방향을 설정했다. 그리고 효과적·통제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하기 위해 합리적이고 융통성있는 장기적인 계획을 세웠다. 농민들에게는 자신의 생산물과 이윤에 대해 개인적으로 관리하고 책임을 지게 했는데, 그결과 1981년 이 정책이 시행된 이래 몇 년 안 되어 농업생산이 크게 증가했다. 경제에 관한 결정을 내림에 있어서 개인의 책임에 비중을 두었고 근면과 창의력에 대한 물질적인 보상을 강조했다. 그리고 고등교육을 받아 중국 발전의 선봉에 설 기술자와 경영자들을 양성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많은 기업체들을 중앙정부의 통제와 감독에서 벗어나게 했고, 공장 경영자들에게는 생산량을 결정하고 이윤을 추구할 권한을 부여했다. 대외정책에서는 서구와의 무역 및 문화적 유대를 강화했고 중국 기업에 대한 외국의 투자를 허용했다.

덩은 당과 정부 내에서의 최고위직을 피했다. 그러나 강력한 정치국 상임위원회 위원 겸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있으면서 군대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또한 중국공산당 부주석이기도 했다. 그가 당내에서 차지하고 있던 직위와 그의 주장은 권위가 있어서 1980년대 내내 중국의 주요 정책결정자였다. 1987년에 덩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사직함으로써 정치국과 정치국 내의 막강한 상임위원회 직위에서 물러났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개혁에 반대하던 많은 연로한 당 지도자들이 은퇴하도록 만들었으며, 1987년 후야오방도 총서기직에서 물러나야만 했다. 덩은 군사위원 주석직은 계속 맡고 있었으며 당내에서의 결정적인 권위도 여전히 가지고 있었다. 1989년 4월 민주화된 정부를 요구하는 학생시위대의 세력 증대로 시위가 베이징으로부터 기타 도시로 번지기 시작하자 덩은 자신의 지도권에 대한 중대한 시련에 직면했다.

덩샤오핑은 시위에 대한 무력진압을 지지하고 뒤이어 학생 지도자들과 시위 가담자들에 대한 재판과 그들에 대한 처형을 허용했다. 이에 따라 덩샤오핑의 정치적 거취가 불안해보였으나 부도옹(不倒翁)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위기를 잘 극복하여 중국 정계의 최고 실권자임을 증명했다. 1992년 10월 12일에 개최된 제14회 전국대표대회 제1차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양상쿤[楊尙昆] 등의 고위급 정치가들을 요직에서 퇴진시키고, 개혁파 주룽지[朱鎔基] 부총리 등을 선출하여 개혁·개방 정책을 이끌 새로운 지도체제를 출범시켰다. 1994년 이후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춘 덩은 1997년 2월 지병으로 사망했다.

덩샤오핑의 배경

덩 샤오핑은 중국 쓰촨 성의 한 마을에서 태어났다. 호찌민, 모택동, 주은래등 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 공부했다. 문화혁명 동안 권좌에서 물러나 있었으며, 1974년에야 복권된다. 1976년 다시 공직에서 물러나지만, 같은 해 모택동의 사망으로 다시 권력의 자리에 돌아온다.


그는 세번의 결혼을 했다. 그의 첫번째 아내는 장 시유안으로 모스크바에 있을때 함께 공부한 동료 중의 하나였다. 그녀는 그의 첫아이를 낳고 며칠 뒤인 24살 때 죽었다. 그 아이 또한 아기 때에 죽었다. 그의 두번째 아내인 진웨이잉은 그가 1933년에 정치적인 공격을 받게 된 직후 그를 떠났다.


그의 세번째 아내인 줘린윈난 성의 한 실업가의 딸이었다. 그녀는 1938년에 공산당의 당원이 되었고, 그 이듬해 야난에 있는 모택동의 동굴 앞에서 덩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5명의 자식을 두었다(2남3녀).

 

덩샤오핑의 학생시절

 

학생시절 중국 공산당(CPC)에 가입한다. 그는 대장정의 베테랑이었으며 마오쩌둥(모택동)의 오랜 전우였다. 마오쩌둥은 혁명 직후 그를 공산당의 비서장으로 임명한다.

1957년반우파투쟁에서 마오쩌둥을 공식적으로 지원한 이후, 덩샤오핑은 중국 공산당의 비서장이 되어 나라의 일상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인한 아사사태로 마오쩌둥에게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자, 덩샤오핑은 좀더 큰 권력을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유소기와 그는 최종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마오쩌둥을 명목상의 지도자로 앉히려는 계획을 세웠다. 유소기와 덩샤오핑이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있을 때, 경제 개혁이 시작되었고, 이로 인해 당 조직과 전체 인민들 사이에서 세력을 키울 수 있었다. 이 당시 마오쩌둥은 자신이 권력에서 소외될까 염려하고 있었다.


권력의 누수를 걱정한 마오쩌둥은 문화혁명을 유발시켰고, 이 시기에 덩샤오핑은 실각하여 당직에서 은퇴한다. 1974년 복귀하지만 재차 1976년에 고초를 겪었다. 당시 그가 겪은 가장 큰 고초는 홍위병에 쫓겨다니던 큰아들이 추락사고로 장애인이 된 것이었다.그 해 마오쩌둥의 별세로 다시 복직한다.

 

덩샤오핑의 혁명

의지가 굳고 매우 지적이었던 농부 출신의 혁명가, 체구가 극히 작고 늙어가는 덩샤오핑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나라의 지도자로서 비공식적이긴 했지만 거대한 인물로 부상하였다. 사실 덩샤오핑은 중국을 이끈 농부 출신의 몇 안되는 혁명가 중의 하나였다. 그 몇 중에는 마오쩌뚱과 한나라명나라의 태조가 있다.


중국 공산당 내에 있는 그의 지지자들을 조심스럽게 선동하여, 등소평은 마오쩌뚱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화궈펑을 교묘하게 따돌릴 수 있었다. 덩샤오핑 자신을 사면해 준 화궈펑을 권력으로부터 축출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권력 변동 때와는 달리, 그는 여전히 살아 있었고 고위직으로부터 물러나있었지만 신체적으로는 해를 당하지 않았다.


이 시기부터 덩샤오핑은 두 가지 결정으로 인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한가지는 문화혁명에 대한 재평가였다. 그는 그 시기에 벌여졌던 극단적인 행위와 이로 인한 고통에 대해서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또 하나는 출신성분제도를 혁파한 것이었다. 그 출신성분제도는 공산 혁명시기에 있었던 조상의 행위를 근거로 전 중국을 두개의 계급으로 나누어 버렸었다. 이 제도 아래에서는 지주 계급은 제도적으로 차별대우를 받아야 했다.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이 두 행동은 그가 그의 정적을 따돌리기 위한 주요 전략 중의 일부였다고 믿고 있다. 문화혁명에 대한 대중의 비판이 일어나게 함으로써 그 사건에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있던 사람들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그 시기에 고통받았던 자신과 같은 사람들의 입지를 강화시켰다.


그가 중국공산당에 대한 통제력을 서서히 재장악하면서 화궈펑은 수상에서 물러나고 자오쯔양(조자양)이 그 자리에 교체되었고, 후야오방(호요방)이 당의장이 되었다. 그의 공식 직함은 비록 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의장이었지만, 1900년대 중반까지 그는 중국의 지도자중에 가장 영향력있는 사람이었다.


본래 실제 권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상과 중국공산당 총서기의 손에 있지만,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는 역할을 감당하도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수상과 중국공산당 총서기은 별도의 사람이 맡기로 되어 있었다. 본래의 계획에는 당에서는 정책을 개발하고 정부에서는 수행하도록 하여, 마오쩌둥이 했던 것처럼 권력이 개인의 취향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분립되도록 했다.

 

덩샤오핑의 개방정책

덩샤오핑이 권력에 있을때, 서방과의 관계가 확연히 증진되었다. 덩샤오핑은 해외순방을 했고, 서방 지도자들과 우호적인 만남을 가졌다. 1979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백악관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과 만났다. 카터 대통령은 마침내 UN의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정식 인정했다.


덩샤오핑이 이루어 낸 것들 중의 또 하나는 1984년 12월 19일 영국과 중국간에 체결한 중영 공동 선언이다. 이 조약에 따라서 홍콩이 1997년에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되었다. 99년동안의 조차를 마치는 홍콩에 대하여 덩샤오핑은 향후 50년간 홍콩의 자본주의체제를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이것은 1국 2체제라고 불리며 이러한 접근방법은 중국본토와 대만이 통합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그러나 덩샤오핑은 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지는 않았다.

 

덩샤오핑과 중국식 사회주의

 

덩사오핑의 개혁이 목표는 4대 근대화에 요약되어 있는데, 농업의 근대화, 공업의 근대화, 과학의 근대화, 기술의 근대화이다. 근대화되고 산업화된 국가가 되는 목표를 성취하려는 이 전략이 사회주의 시장경제다.


덩샤오핑은 중국은 사회주의의 초기단계에 있고 당의 의무는 중국식 사회주의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중국식 마르크스주의의 해석은 경제 정책 결정에 있어서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감소시켰다. 마르크스-레닌주의 뿐 만 아니라 공산주의 가치관의 우선 순위를 하향 조정하여 덩샤오핑은 어떤 정책이 단순히 마오쩌둥이나 더 보수적인 진연과 관계가 없다고 해서 거부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덩사오핑은 자본주의 국가의 정책과 비슷하다고 해서 어떤 정책을 반대하지 않았다.


덩샤오핑이 경제 개혁이 일어나도록 하는 이론적인 배경과 정치적 지원을 제공했지만, 등샤오핑 본인으로 부터 나온 경제 개혁은 거의 없었다. 일반적으로 개혁은 지역 지도자들로부터 소개되었는데, 이러한 것들은 종종 중앙정부의 지도방향과 충돌하곤 하였다. 이러한 개혁이 성공적이었고 유망하다고 밝혀지면 대규모로 여러분야에서 채택되었고 종국에는 국가전체에 소개된다. 많은 개혁이 동아시아의 호랑이들에 의해서 경험된 것들이었다.


이것은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한 페레스트로이카의 패턴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의한 페레스트로이카는 대부분의 개혁들이 고르바초프 자신에 의하여 제안되었다. 많은 경제학자들은 페레스트로이카의 하향식 접근과 대조되는 등소평의 개혁은 상향식 개혁이 성공의 열쇠였다고 이야기 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덩샤오핑의 개혁은 기술적으로 숙련된 관료들에 의하여 계획된 중앙 집중적 대규모 경제 제도를 소개하였다. 이것은 마오쩌뚱의 대중 선동적인 경제 건설 방식을 버린 것이다. 소비에트 모델이나 마오쩌둥의 모델과 다르게 시작 경제를 통한 간접적인 관리 방식이었고, 이 방법은 대부분 서구 국가의 경제 계획과 조정 매커니즘을 본 딴 것이었다.

 

등샤오핑과 절차의 제도화

경제를 개혁하고 개방하면서, 덩샤오핑은 그 절차를 정형화하여 공산당의 힘을 강화하려는 시도를 하였다. 덩샤오핑의 후속 행보는 지도부가 본래 의도했던 것보다 더 큰 권력을 갖도록 야기했다. 1989년에 양상쿤 주석은 당시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의 의장인 덩샤오핑과 협력하여 주석의 명의로 1989년 텐안먼 시위를 진압하도록 베이징에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었다.


장쩌민은 덩샤오핑과 당의 다른 원로들에게 발탁된 촉망받는 후계자였고, 당 서기 자오쯔양을 대신할 인물로 뽑혔다. 장쩌민은 학생 시위대에게 온건하다고 평가되었다. 텐안먼 사건과는 직접적으로는 관련되지 않았지만, 장쩌민은 텐안문 사건 이후에 상하이에서 비슷한 시위를 예방하기 위한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중앙위원으로 승진되었다.

덩샤오핑은 1997년 2월 19일 장쩌민을 권력의 중심에 올려 놓은 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덩샤오핑의 유산

 

언론인 짐 로워은 덩샤오핑의 1979년에서부터 1994년의 개혁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인류 복지 향상의 가장 큰 향상을 가져왔다고 말했다.


언급한 것과 같이 덩샤오핑의 정책은 사회주의 틀안에서 외국 자본에 경제를 개방하였고 시장을 개방하였다. 그가 죽고 난 뒤 조자양의 지도아래 중국은 연평균 8%의 GDP 성장을 계속 했고,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국민소득 성장률을 기록했다. 천안문 사태를 불러 일으켰던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개혁 절차가 제도화 되고 농민혁명가에서 교육을 잘 받은 전문기술인으로 세대 교체가 이루어져서 정치 제도는 안정되었다. 사회문제도 중국본토가 매년 빠르게 근대화되고 번역하게 됨에 따라 개선이 되었다.


하지만 덩샤오핑의 개혁은 몇 가지의 남겨진 과제를 가지고 있다. 시장개혁의 결과로 1990년대 중반에는 중앙정부소유의 국영기업들이 부실화되었고, 그들이 이윤을 내지 못하고 경제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그들은 정리될 필요가 있다.


마침내, 공산당의 지배를 유지하면서도 마오쩌뚱의 공산주의적 가치보다 실용주의가 더 낫다는 것을 확증시키는 덩샤오핑주의는 서양에 많은 질문들을 생겨나게 했다. 중국과 그 밖의 여러 관찰자들은 더 역동적이고 풍성해지는 중국 사회를 하나의 당이 어느 정도까지 통제할 수 있을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출처: Daum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