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세계)

고대 이집트의 문명과 람세스의 역사[3]

지식창고지기 2010. 2. 2. 19:02

최초의 국제 조약

1906
년에 베르린 대학과 콘스탄티노플의 오토만 박물관 공동 발굴팀은 터키의 보가즈코이(Bogazk?y)에서 히타이트의 유물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 발굴에서 바빌로니아 설형문자로 적힌 판을 발굴되었는데 그것이 유명한 빈클러 판(tablet Winckle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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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판은 기원전 1270, 람세스 2세와 히타이트의 핫투시리 3(Hattushili Ⅲ)가 맺은 평화협정이 기록되어 있다. 같은 협정이 이집트의 카르낙 신전에도 새겨져 있다. 육로로 2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두 장소에서 3천 년 이상이나 경과된 동일한 문서가 발견된 것은 기적이라고 볼 수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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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협정이 맺어지게 된 원인은 물론 카데시 전투 때문이다. 카데시 전투로부터 15년이 경과한 후 두 나라는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했음이 틀림없다.놀랍게도 이 협정의 조문은 현대 국가 간에 체결되는 조약과 완전히 같은 체계였다. 협정의 이름은위대한 왕, 이집트 국왕이며 용자인 람세스와 히타이트 국의 위대한 왕 핫투시리 사이에, 좋은 평화와 위대한 왕자에 적합한 우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한 조약으로 되어 있다. 본문의 일절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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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히타이트에 외적이 들어오고 위대한 왕, 히타이트 왕 핫투시리가 람세스에게 사자를 파견하여적에 대해서, 나를 도우라라고 말씀한다면, 위대한 왕, 이집트의 국왕 람세스는 그 보병대와 전차대를 파견하여 적을 살육하고 히타이트를 위하여 복수할 것이다


물론 동일한 문구로 이집트가 공격당했을 때 힛타이트 군이 원조한다는 조항이 기재되어 있다. 이어서 두 나라의 왕권 보호, 도망자의 추방과 망명자에 대한 사면이 적혀 있다. 불가침 조약도 체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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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이트의 위대한 지배자는 결코 이집트 땅을 침범하지 않는다. 이집트의 위대한 왕인 람세스는 결코 히타이트의 땅을 침범하여 약탈하지 않는다


이 조약을 보증하기 위해 양국 간에 체결된 조약은 은으로 된 탁자에 기록하며 1,000명의 하티 신과 여신, 1,000명의 이집트의 신과 여신이 증인으로 기록되었다. 만약에 누구든지 조약을 어기는 자는 저주받아 그 나라와 신하들이 멸망하며 조약을 지키는 자는 축복을 받으라고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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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양국은 자신들의 조약을 더욱 확실히 하기 위해 당시로서는 가장 자연스러운 협정의 방법으로 히타이트의 공주가 이집트로 출가하여 람세스 2세와 결혼했다. 또한 이집트의 왕비인 네페르타리와 히타이트의 왕비인 푸두케파도 소식을 교환했고 서로 교환 방문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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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이후


람세스 2세는 제위에 오른 지 몇 년이 안되어 카데시 전투라는 거대한 전투를 벌였지만 그 후에는 비교적 안정된 상태로 국가를 운영했다. 그가 왕위에 있었던 기간이 무려 67년이나 되었지만 국내외로 아무런 문제점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안정된 통치 기간을 이용하여 대규모 건물들을 건설했으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아부심멜 신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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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
년에 이집트에서 아스완댐을 건설하자 아부심멜 신전이 수몰될 위기에 처했다. 유네스코는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이 지역의 유물을 보호하기 위해 국제 사회에 동참을 요청하였고 50여 국가들이 참여하는 구난 작업이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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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은 단순하여 아스완댐이 건설되더라도 수몰되지 않도록 위쪽으로 65미터를 옮기는 것이었다. 람세스 2세의 좌상과 강 양쪽에 위치한 2개의 사원을 고지대로 옮기기 위해 석조물을 1천 개 이상으로 절단한 후 이를 운반하여 원형대로 복원하는 대역사(
大役事)였다. 유적을 이전시킬 대상 지역도 원래 유적이 있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비슷한 모습으로 조성하였다. 이 사업은 인류 문화재를 국제 사회가 공동으로 지킨 좋은 예로서, 현재도 유네스코에서는 세계적으로 보호해야 할 문화 유산을 지정하여 관리 및 후원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람세스 2세가 67년이라는 장기 집권을 하고 무려 110명이나 되는 자손을 낳았는데 그 중에서 4명의 딸과 결혼했다는 것도 화제 거리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근친 결혼은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은 파라오는 인간이자 신이기 때문이다. 신이 평민과는 결혼할 수 없었으므로 파라오와 가장 가까운 근친과 결혼하는 것이 오히려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고대 이집트의 파라오에 대해서 현대적인 감각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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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상 람세스 2세는 역사상 가장 먼저 전투의 승패에 대해 거짓말을 한 장본인이 되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 중에서 람세스 2세를 비난하는 사람이 비교적 많은 것은 그가 전쟁의 승패를 과장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역사를 왜곡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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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집트가 세계의 중심이며 또 신이 사는 세계로 믿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역사에 대해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일부 국가나 위정자들은 역사적인 사실을 조작하는 데 서슴지 않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조작하지는 않는 것을 자부심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집트인들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서는 조작하거나 가필을 하지 않고 모두 지웠다. 그들은 수많은 신전에 새겨진 이름이나 그림의 경우 얼굴을 지우거나 이름을 삭제했는데, 현재 이집트의 유적에서 이런 장면을 많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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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람세스 2세는 자신의 통치 기간 동안 건축물을 새로 지으면서 자신의 선조가 건설한 건축물의 재료를 다반사로 빼냈다. 그것은 자신의 건축물을 보다 쉽게 건설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영국인 고고학자 퀴벨은 데이르 엘 바하리에 있는 아누비스의 지성소에서 빼내 온 기초 벽돌 층을 발견하여 하셉수트가 재료를 도둑맞은 지 3,000년 후에 제자리에 도로 갖다 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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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자들을 더욱 분노하게 하는 것은 람세스 2세가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건축물에서 선조의 이름을 지우고 마치 자신이 건설한 것처럼 자신의 이름을 적어 놓았다는 점이다. 소위 역사를 가필하여 조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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