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일본문학(Britannica) - 근세( 에도 시대)

지식창고지기 2010. 2. 11. 10:05

근세( 에도 시대)

무로마치 바쿠후의 성립(1573)으로부터 에도 바쿠후[江戶幕府] 멸망(1867)까지, 약 300년간을 근세라고 한다. 근세문학은 18세기 중엽을 경계로 전기·후기로 나누고 이를 다시 4기로 나눌 수 있다. 즉 에도 초기(1661~81경)까지가 제1기, 겐로쿠[元祿 : 1688~1704] 연간을 중심으로 1716~36년경까지가 제2기, 1736~41년경부터 1781~89년에 이르는 약 50년간이 제3기, 이후 바쿠후 말까지가 제4기이다. 이 시대의 문학은 전대 문학을 계승하고 있으나 상인·장인(조닌[町人]이라 함)의 경제력이 향상됨에 따라 서민문학으로 한층 확대되어간 점이 커다란 특색이다. 16세기말 포교를 위해 건너온 가톨릭교도와 한반도에서 건너간 활자인쇄술에 자극을 받아 정판(整版)인쇄가 비약적으로 발전함으로써 문학이 인쇄물로서 급속도로 독자층에 침투해갔다. 인쇄술의 발달로 민중의 계몽 교화가 진전됨에 따라 문학의 주도권은 조닌의 손으로 넘어갔다. 근세 전기의 문학은 주로 문화적 전통이 있는 교토와 오사카 지방을 중심으로 번영했는데 후기에는 신흥 정치도시이며 소비도시인 에도로 옮겨갔다. 따라서 근세 전기를 가미가타문학[上方文學]의 시대, 근세 후기를 에도 문학의 시대라고 부른다.

 

고쿠가쿠[國學]운동과 와카

도쿠가와 바쿠후는 주자학을 관학(官學)으로 삼았다. 그러나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문헌을 실증적으로 파악하고 인간의 자연적 욕망을 긍정하려는 경향이 일어났는데, 이토 진사이[伊藤仁齊] 고학파(古學派), 오규 소라이[萩生徂徠]의 고문사학파(古文辭學派) 등이 그것이다. 주자학파 중에서 가이바라 에키켄[貝原益軒],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무로 규소[室鳩巢] 등은 특색있는 수필을 남겼다. 특히 하쿠세키는 역사·지리·언어 등 넓은 분야에 걸쳐 합리주의적 태도로 연구해나갔으며 자서전 〈오리타쿠시바노키 折たく柴の記〉를 썼다. 그리고 17세기 후반에 시모코베 조류[下河邊長流]와 승려 게이추[契沖]가 〈만요슈〉를 연구했는데, 게이추는 〈만요다이쇼키 萬葉代匠記〉를 써서 고전연구에 실증적인 방법을 확립했다. 고전에 관한 학문은 가다 아즈마마로[荷田春滿]나 가모노 마부치[賀茂眞淵]에 이르면 고전연구를 통해 고도(古道)를 구명하려는 자각을 갖게 되는데 이를 고쿠가쿠라 한다. 마부치의 학문을 계승하여 고쿠가쿠를 대성한 사람은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이다. 노리나가는 〈고지키덴 古事記傳〉·〈겐지 모노가타리 다마노오구시 源氏物語玉小櫛〉 등 고전 연구에 큰 성과를 남겼다. 노리나가의 학문은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에게 계승되고 많은 고쿠가쿠 학자가 배출되었다. 고쿠가쿠의 발흥은 당시의 문학에 여러 가지 영향을 미쳤는데 특히 와카에 혁신적 기운을 가져다주었다. 근세 초두의 시인으로는 호소카와 유사이[細川幽齊]가 있고, 그의 문하인 기노시타 조쇼시[木下長嘯子]가 다소 청신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으나 전체적으로 당시의 와카는 인습적인 풍조에 빠져 있었다. 그러나 겐로쿠 시대에 시모코베 조류, 승려 게이추 등이 나타나 중세 가학(歌學 : 와카에 관한 학문)의 전통을 비판하고 〈만요슈〉에 눈을 돌리게 되었으며 이어 만요 부흥을 이상으로 하는 가모 마부치가 등장한다. 또한 마부치의 만요초를 배격하고 〈고킨슈〉를 존중한 가가와 가게키[香川景樹]가 등장했는데 그의 유파를 게이엔파[桂園派]라 일컫는다. 근세말경에는 승려 료칸[良寬], 오쿠마 고토미치[大隈言道], 히라가 모토요시[平賀元義], 다치바나노 아케미[橘曙賢] 등 지방 출신의 특색있는 시인이 나타나 우수한 작품을 남겼다.

 

하이카이[俳諧]의 흥륭

렌가시[連歌師]의 여기(余技) 영역에 머물러 있던 하이카이는 마쓰나가 데이토쿠[松永貞德]가 나타나면서 급속도로 발전했다. 이 무렵부터 하이카이의 첫구 5·7·5만을 독립시키는 방법이 선보였는데 이를 홋쿠[發句]라고 불렀다. 데이토쿠파[貞德派]의 하이카이를 데이몬[貞門]이라 하는데 그의 문하에 고전연구로 유명한 기타무라 기긴[北村季吟]이 있다. 이지적인 언어 유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데이몬하이카이에 반대하여 일어난 것이 니시야마 소인[西山宗因]을 중심으로 하는 단린파[談林派]의 하이카이이다. 데이몬이 형식주의적인데 비해 소인의 시풍은 보다 자유롭고 해학적이다. 이 무렵 전국적인 산업발전을 바탕으로 하는 신흥 조닌이 진출했는데 단린하이카이는 이 신흥 조닌의 취향에 맞아 전국적으로 유행했다. 소인 문하의 대표적 작가로는 오사카의 조닌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가 있다. 단린하이카이는 데이몬의 보수성을 타파하기는 했으나 전통 타파에 급급한 나머지 문예로서 시정(詩情)을 상실해갔다. 단린하이카이가 한계에 달하자 새로운 하이카이로의 모색이 시도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마쓰오 바쇼[松尾芭蕉]의 쇼후하이카이[蕉風俳諧]가 출현했다. 바쇼는 단린의 도시적 향락주의에 만족하지 않고 진정한 시를 찾아 모색과 탐구를 계속하여 마침내 〈겨울해 冬の日〉(1684)에 이르러 새로운 시풍을 표방했다. 바쇼는 〈오쿠노호소미치 奧の細道〉(1694) 등에 묘사된 바 떠돌이 생활을 통해 자연에 동화함으로써 시구(詩句)를 심화·발전시켜갔다. 〈오이노코부미 笈の小文〉(1688)라는 기행문에서 엿보인 한아고담(閑雅枯淡)의 사비(さび)의 경지는 〈사루미노 猿蓑〉(1691)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다시 만년의 〈숯섬 炭俵〉에서 가루미[輕み]의 경지에 도달하는데 이는 초기 쇼후[蕉風]의 고답성(高踏性)을 부정하고 고도의 시정과 그것을 평이하게 표현하려는 통속성을 융합한 것이었다. 문하에는 기카쿠[其角]·란세쓰[嵐雪]·교라이[去來]·조소[丈草]·본초[凡兆] 등 뛰어난 시인이 있었으나 바쇼 사후 쇼몬[蕉門]은 분열하고 하이카이 시단(詩壇)은 세속화의 길을 걸었다. 오랜 침체 끝에 18세기 중엽 하이카이 혁신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심적 존재인 요사 부손[與謝蕪村]은 객관적이며 회화적인 화려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부손 외에 오시마 료타[大島蓼太], 가야 시라오[加舍白雄], 가토 교타이[加藤曉台] 등이 있었으며 이들의 사후에 침체해가는 시단에서 이채를 띤 시인은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이다.

 

교카[狂歌]·센류[川柳]

해학적이고 익살스러운 비속한 단카인 교카는 18세기 후반에 최성기를 맞아 조닌들이 애호했을 뿐 아니라 지식인들 사이에도 유행했다. 센류는 인정이나 풍속의 기미(機微)를 파악하여 그것을 예리하고 교묘하게 표현하는 묘미가 있는 17음의 최단시형으로, 창시자는 가라이 센류[柄井川柳]이다. 번거로운 작법이 필요하지 않고 기지·재치를 겨루는 흥미가 있어 오늘날까지 서민문학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근세소설의 탄생

이 시대에 최초로 등장한 소설은 무로마치 시대의 오토기조시[お伽草子]의 계통을 잇는 가나조시[假名草子]이다. 상업 발전에 따라 대규모로 등장한 도시 조닌의 지식욕이나 문학의식을 충족시키기 위한 출판물이 많이 간행되었다. 소설만이 아니라 계몽·교훈·오락·실용 등을 목적으로 하여 가나문으로 평이하게 씌어졌기 때문에 가나조시라 불렸다 (→ 색인 : 논픽션 산문). 대표작으로는 작자 미상의 〈우라미노스케 恨之介〉, 도미야마 도야[富山道冶]의 〈지쿠사이 竹齋〉, 스즈키 쇼산[鈴木正三]의 〈두 사람의 비구니 二人比丘尼〉, 아사이 료이[淺井了意]의 〈도카이도 명소기 東海道名所記〉·〈우키요 모노가타리 淨世物語〉·〈오토기보코 御伽婢子〉 등이 있다. 그밖에 이솝 우화의 번역인 〈이소호 모노가타리 伊曾保物語〉, 소화본(笑話本)인 〈세이스이쇼 醒睡笑〉 등도 주목된다. 가나조시에는 세상을 적극적·긍정적으로 보려는 현실주의적인 경향이 보인다. 가나조시가 발달함으로써 마침내 조닌 자신들에 의한 신문예가 성립되었다. 조닌을 대상으로 하는 본격적인 근세소설인 우키요조시[浮世草子]는 조닌 출신인 이하라 사이카쿠에 의해 창시되었다. 사이카쿠는 〈고쇼쿠이치다이오토코 好色一代男〉(1682)를 비롯한 일련의 호색물(好色物)과 신흥 조닌의 모습을 그린 〈니혼에이다이구라 日本永代藏〉·〈세켄무네잔요 世間胸算用〉 등을 남겼다. 사이카쿠 이후 우키요조시는 교토 하치몬지야[八文字屋] 서점에서 간행된 소설 중심의 하치몬지야본[八文字屋本] 시대가 펼쳐졌다. 사이카쿠의 영향을 받아 배출된 많은 작가 중에 에지마 기세키[江島其磧]가 특히 유명한데 그는 〈세켄무스코카타기 世間息子氣質〉(1715) 등 '가타기모노'[氣質物]라 불리는 계열의 작품을 썼다. 기세키 사후 하치몬지야본은 쇠망했다.

 

에도의 소설

우키요조시 시대에 이어 소설계에는 요미혼[讀本]과 샤레본[酒落本]이 등장했다. 발상기의 요미혼에는 중국 백화소설(白話小說)의 영향이 강하게 엿보이는데, 쓰가 데이쇼[都賀庭鏡]의 〈하나부사조시 英草紙〉(1749)·〈시게시게야와 繁野話〉(1766)가 대표적 작품이다. 요미혼이란 당시의 그림 위주의 책에 대해 문장 위주의 소설을 뜻하는데, 하치몬지야본이 갖는 전기성(傳奇性)이 한층 강조된 것이다. 우에다 아키나리[上田秋成]의 〈우게쓰 모노가타리 雨月物語〉(1776)는 중국의 괴기담을 일본화하는 데 성공한 일본 괴기소설의 백미이다 (→ 색인 : 게사쿠). 샤레본은 유곽에 드나드는 손님과 창녀와의 대화를 중심으로 엮은 단편 사실소설이다. 산토 교덴[山東京傳]이 등장해 〈쓰겐소마가키 通言總籬〉(1778)·〈게이세이카이시주핫테 傾城買四十八手〉(1790) 등을 썼으나 바쿠후의 금지령에 저촉되어 교덴이 처벌된 후로 샤레본 자체도 변모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근세 초기부터 에도에는 아카혼[赤本]·구로혼[黑本]·아오혼[靑本] 등 표지의 색에 따라 명칭을 붙인 ' 구사조시'[草雙紙]가 있었는데 처음에는 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이던 것이 성인용으로 발전해갔다. 그 첫작품이 고이카와 하루마치[戀川春町]의 〈긴킨센세이에이가노유메 金口先生榮花夢〉(1775)이다. 기뵤시[黃表紙]계에서도 교덴이 〈에도우마레우와키노카바야키 江戶生艶氣樺燒〉(1785) 등을 써 제1인자로 활약했다. 그러나 개혁 정치에 따른 제재를 받아 점차 그 내용이 복수담으로 흘러 줄거리가 복잡해짐으로써 합책본(合冊本) 형식인 고칸[合卷]으로 변화해갔다. 류테이 다네히코[柳亭種彦]의 〈니세무라사키이나카겐지 언偐紫田舍源氏〉는 고칸의 대표작이나 쇼군가[將軍家]를 풍자했다 하여 미완성인 채 판매 금지되었다. 처벌을 받은 후 산토 교덴은 요미혼에서 활로를 찾고자 했으나 다키자와 바킨[瀧澤馬琴]에는 미치지 못했다. 바킨의 수많은 작품 중 〈진세쓰유미하리즈키 椿說弓張月〉(1806~10)· 〈난소사토미핫켄덴 南總里見八犬傳〉(1814~42)은 웅대한 구상과 복잡한 줄거리로 명문을 구사한 대표작이다. 특히 후자는 중국 전기소설 〈수호전 水滸傳〉을 일본화한 것으로 에도 요미혼의 최고봉을 이룬다. 샤레본의 계통을 잇는 것으로 당대의 세태와 인정을 묘사한 곳케이본[滑稽本]과 닌조본[人情本]이 있다. 곳케이본은 초기에 히라가 겐나이[平賀源內] 등이 활약했으며 19세기 초엽의 대표 작가로 짓펜샤 잇쿠[十返舍一九]와 시키테이 산바[式亭三馬]가 있다. 닌조본은 말기의 샤레본에서 파생한 작품군으로, 샤레본이 유곽의 세계만을 대상으로 한 데 대해 에도 조닌의 폭넓은 일상생활을 무대로 하여 연애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다메나가 슌스이[鳥永春水]는 〈슌쇼쿠우메고요미 春色梅兒譽美〉(1832~33)가 호평을 받은 데 힘입어 많은 속편을 내놓았으나 퇴폐적이고 무기력한 세태를 묘사해 그 전성기도 오래가지 못했다.

 

조루리[淨瑠璃]·가부키[歌舞伎]

헤이쿄쿠[平曲]·요쿄쿠[謠曲]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는 조루리는 음곡에 맞추어 이야기를 음송하는 일종의 극이다. 소박한 형태이기는 하나 중세 후기에 이미 그 원형이 있었으며, 근세 초기에 이르러 비파를 반주악기로 사용하던 것이 샤미센[三味線 : 일본의 3현악기]으로 바뀜에 따라 신시대의 예능다운 특색을 갖추게 되었고, 다시 오랜 전통을 가진 인형극(구구쓰[傀儡])과 제휴함으로써 닌교조루리[人形淨瑠璃]라는 새로운 연극으로 성장해 갔다 (→ 색인 : 분라쿠). 신흥도시 에도에서는 호쾌한 긴피라부시[金平節]가 환영을 받았으며 교토·오사카를 중심으로 한 게이한[京坂] 지역에서는 세련된 곡이 환영을 받아 이노우에 하리마노조[井上播磨掾], 우지 가가노조[宇治加賀掾]등이 출현하여 예술적 향상에 힘썼다. 이 가미카타조루리[上方淨瑠璃] 계열에서 다케모토 기다유[竹本義太夫]가 등장하여 다케모토자[竹本座]를 창설함으로써 조루리를 대성시켰다. 다케모토자의 전속작가인 지카마쓰 몬자에몬[近松門左衛門]은 다케모토 기다유의 조루리 대성에 커다란 공헌을 했을 뿐 아니라 조루리 대본을 고도의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의 작품 중에서는 〈고쿠센야캇센 國性爺合戰〉(1715)과, 세와조루리[世話淨瑠璃]의 최초 걸작으로 알려진 〈소네자키신주 曾根崎心中〉(1703)가 유명하다. 그밖에 〈메이도히캬쿠 冥途飛脚〉(1711)·〈신주텐노아미지마 心中天網鳥〉(1720)·〈온나고로시아부라지고쿠 女殺油地獄〉(1721) 등이 있다. 당시 다케모토자에 대해 도요타케자[豊竹座]에 기노 가이온[紀海音]이 있어 이 양자가 대립·경쟁하면서 조루리를 번영시켰다. 가이온은 지카마쓰에 비해 의리를 존중하는 경향이 있으며 〈가마쿠라산다이키 鎌倉三代記〉(1718)·〈신주후타쓰하라오비 心中二つ腹帶〉(1722) 등이 성공작이다. 이들에 이어 다케다 이즈모[竹田出雲]와 지카마쓰 한지[近松半二]가 활약했는데 합작 형식의 작품이 많다. 이즈모는 나미키 센류[竝木千柳] 등과의 합작 〈스가와라덴주테나라이카가미 菅原傳授手習鑑〉(1746)·〈요시쓰네센본자쿠라 義經千本櫻〉(1747)·〈가네데혼추신구라 假名手本忠臣藏〉(1748) 등 규모가 큰 걸작을 많이 남겼다. 한지도 합작으로 〈혼초니주시코 本朝二十四孝〉(1766)·〈이모세야마온나테이킨 姝背山婦女庭訓〉(1771) 등의 명작을 남겼다. 한지 이후 조루리는 급속도로 쇠퇴해 다케모토·도요타케 양자가 잇달아 소멸했다.

한편 가부키의 원류는 이즈모 대사[出雲大社]의 무녀 오쿠니[阿國]가 16세기말 교토에서 시작한 가부키 춤에서 찾을 수 있다. 오쿠니로 시작된 온나가부키[女歌舞伎]가 풍기문제로 1629년 금지되면서 남성이 하는 와카슈가부키[若衆歌舞伎]·야로가부키[野郞歌舞伎]로 변천했고, 차츰 연극으로서 체재를 갖추어 무용 본위의 연기에서 기예 본위의 대사극적(臺詞劇的) 양식으로 이행하여 희곡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17세기 말엽부터 18세기 초엽 교토에 사카타 도주로[坂田藤十郞]가 출현하여 가미카타의 가부키가 활기를 띠게 되었는데 이는 지카마쓰 몬자에몬이 많은 각본을 써서 가부키 발달에 기여한 데 힘입은 바 크다. 이에 대해 에도 가부키를 확립한 것은 초대(初代)인 이치카와 단주로[市川団十郞]이다. 그러나 실제로 가부키가 융성기를 맞이한 것은 조루리가 쇠퇴한 18세기 중·말엽부터이다. 에도에 사쿠라다 지스케[桜田治助], 가미카타에 나미키 쇼조[竝木正三] 등 많은 작가가 출현하여 가부키계에 활기를 불어넣었는데 특히 이어서 등장한 나미키 고헤이[竝木五甁]는 에도의 감각적인 극에 가미카타 가부키의 합리성을 첨가시켰다. 나미키 고헤이의 사실성을 더욱 철저히 하여 당시의 하층 사회의 풍속이나 인물을 여실히 묘사한 작가가 쓰루야 난보쿠[鶴屋南北] 4세이다. 대표작 〈도카이도요쓰야카이단 東海道四谷怪談〉은 괴담극으로서 하나의 완성을 보였다. 이어서 세가와 조코[瀨川如皐], 가와타케 모쿠아미[河竹默阿彌] 등장했다. 조코는 〈요와나사케우키나노요코구시 與話情浮名橫櫛〉(1853) 등을 썼으며 가와타케 모쿠아미는 지카마쓰 이래의 근세 연극을 집대성하는 동시에 다음 시대로의 교량 역할을 했다. 〈아오토조시하나노니시키에 靑砥稿花紅彩繪〉 등 많은 걸작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