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일본)

일본문학(Britannica) - 중세(가마쿠라·무로마치시대)

지식창고지기 2010. 2. 11. 10:01

중세(가마쿠라·무로마치시대)

12세기말 가마쿠라 바쿠후 설립(1192) 무렵부터 17세기초 에도 바쿠후 설립(1603) 이전까지의 약 400년간을 중세라고 하는데, 이 400년간은 가마쿠라 시대(1192~1333), 남북조(南北朝)·무로마치[室町] 시대(1334~1573), 아즈치[安土]·모모야마[桃山] 시대(1574~1600)로 나눌 수 있다. 전대의 문학이 주로 교토 귀족계급 주도 아래 있었던 데 비해 중세의 문학은 귀족과 신흥무가(新興武家)·승려·은둔자·예능인 등의 협력·제휴에 의해 발달했다. 또 이들에 의해 표면에 나타나지 않았던 민간문학·예능이 부각된 것도 주목할 만하다. 중세 문학의 특징은 교토 귀족문화와 지방 서민문화가 결합·형성된 점에 있다. 여러 차례에 걸쳐 일어난 전국적인 동란은 양 문화의 교류를 가능하게 했으며 은둔자·승려계급이 작가나 전승자로서 활약하는 장(場)을 마련해 주었다. 중세 문학의 대부분에 불교적 세계관인 무상관(無常觀)이 짙은 음영을 드리우고 있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신코킨와카슈 新古今和歌集〉 시대

가마쿠라 바쿠후가 설립되고 정치의 실권이 무가로 넘어갔으나 귀족계급은 여전히 궁정정치와 귀족적 문학을 보호·유지하려 했다 (→ 색인 : 가마쿠라 시대). 따라서 초기 20~30년간은 복고 풍조가 현저히 성행했고 특히 와카가 활기를 띠어 뛰어난 시인이 많이 배출되었다. 마침내 1205년 와카를 사랑했던 고토바 상황[後鳥羽上皇]의 명을 받아 후지와라 슌제이의 아들 사다이에[定家]와 이에타카[藤原家隆] 등이 〈신코킨와카슈〉를 편찬했다. 이는 '새로운 〈고킨슈〉'라는 포부 아래 편찬된 귀족문학 최후의 결실이었다.

약 2,000수가 수록된 이 시집은 유현(幽玄)·유심(有心 : 깊은 정취와 여운이 있는 시풍)이라는 문학이념을 바탕으로 한 정교하고 섬세하며 예술적 향기가 높은 사화집(詞華集)으로서 〈만요슈〉·〈고킨슈〉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고전 와카의 독자적인 정점을 이루었다. 그러나 조큐[承久]의 난(1221) 이후 와카 시단은 침체·몰락의 길을 걷게 되나 칙찬집 편찬은 계속되어 가마쿠라 시대에 8개 시집이 나오게 되었다. 60여 년에 걸친 남북조의 동란과 무로마치 시대의 끊임없는 분쟁으로 하극상(下剋上) 풍조가 초래되어 서민의 지위와 생활이 비약적으로 향상함에 따라 상류귀족의 세력이 완전히 실추되었다. 대신에 상층 무가나 승려가 귀족과 대등하게 또는 그들을 대신하여 귀족문화의 지위를 누리게 되었다.

 

후기 한시문과 와카·렌가[連歌]

전대에 귀족 남성의 점유물이었던 한문학은 귀족계급의 후퇴와 비례하여 침체해갔다. 그러나 가마쿠라 시대 말엽부터 남북조시대에 걸쳐 중국의 선승들이 일본에 건너오고 일본의 승려들이 중국 유학을 하게 되면서 한문학이 부활했는데 이를 고잔 문학[五山文學]이라 일컫는다. 남북조시대가 그 최성기로, 뛰어난 한시문과 게문(偈文)을 남겼으나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러 선종 사원이 타락함에 따라 쇠퇴해갔다. 칙찬 와카집은 남북조시대에도 4개 시집이 나왔으나 와카는 점차 저조해져 무로마치 시대의 〈신쇼쿠코킨와카슈 新續古今和歌集〉(1439)를 끝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이러한 사실은 귀족문학으로서 와카가 종언을 맞았음을 뜻하는 것인데, 대표적 시인으로는 남북조시대의 돈아[頓阿], 무로마치 시대의 쇼테쓰[正徹]·신케이[心敬] 등 승려를 들 수 있다.

와카를 대신하여 성행한 것은 렌가이다. 렌가는 한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재치를 바탕으로 협동 제작하는 문예로서 헤이안 초기부터 등장했다. 본래는 와카 1수를 상구(5·7·5)와 하구(7·7)로 나누어 두 사람이 읊던 단(短) 렌가, 후기에는 3명 이상이 모여 1구씩 이어가는 장(長) 렌가가 생겨 가마쿠라 시대에도 종종 읊어졌다. 남북조시대에 섭정 니조 요시모토[二條良基]는 구사이[救濟]를 비롯한 은자(隱者) 렌가시[連歌師 : 전문적인 렌가 작가]의 협력을 얻어 렌가 작법을 제정하고 최초의 렌가집 〈쓰쿠바슈 濟玖波集〉를 편찬했다. 이후 렌가는 소제이[宗砌]·신케이[心敬] 등에 의해 발전해오다가 15세기말 이오 소기[飯尾宗祗]에 의해 완전한 예술적 경지에 도달했다. 렌가집으로는 소기가 편찬한 〈신센쓰쿠바슈 新撰菟玖波集〉 등이 있다. 소기를 정점으로 무로마치 말기에는 렌가 본래의 자유로운 기운이 상실되어감으로써 이를 타개하는 움직임으로 하이카이렌가[俳諧連歌]가 등장했다. 하이카이렌가는 재치와 자유로운 해학을 내용으로 하는 야마자키 소칸[山崎宗鑑], 아라키다 모리타케[荒木田守武]에 의해 개척되었다. 이들은 전통적인 와카·렌가를 대신하는 새로운 시 형식인, 근세 하이카이의 기초를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기코 모노가타리[擬古物語]와 레키시 모노가타리[歷史物語]

모노가타리에서는 가마쿠라 초기의 〈마쓰우라미야 모노가타리 松浦宮物語〉·〈스미요시 모노가타리 住吉物語〉 등 전대의 왕조 모노가타리의 모방작이 많이 나왔다. 〈겐지 모노가타리〉와 그밖의 모노가타리를 비평한 모노가타리 평론서 〈무묘조시 無名草子〉의 출현은 주목할 만하다. 또한 전대의 모노가타리 문학을 대신하는 단편 이야기책 오토기조시[御伽草子]가 다수 출현했는데 대부분이 치졸한 작품이다. 중고시대의 레키시 모노가타리의 뒤를 이어 가마쿠라 초기에 〈미즈카가미 水鏡〉가, 남북조시대에는 〈마스카가미 增鏡〉가 성립되었으나 회고적이며 독창성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지엔[慈円]의 〈구칸쇼 愚管抄〉,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의 〈진노쇼토키 神皇正統記〉 등 사관(史觀)을 주로 한 사론(史論)이 출현했다.

 

군키 모노가타리[軍記物語]

험난한 역사의 움직임을 정면에서 다룬 〈호겐 모노가타리 保元物語〉· 〈헤이지 모노가타리 平治物語〉로 시작하여 〈헤이케 모노가타리 平家物語〉로 완성되는 것이 군키 모노가타리이다. 중고시대의 〈쇼몬키 將門記〉 등 한문체의 전기(戰記), 〈곤자쿠 모노가타리슈 今昔物語集〉의 무가설화 등에서 싹튼 군키 모노가타리가 중세에 이르러 시대를 반영한 레키시 모노가타리로서 결실을 보게 된 것은 군키 모노가타리가 고대에서 중세로 옮겨가는 커다란 변혁기를 무대로 했기 때문이다. 〈호겐 모노가타리〉·〈헤이지 모노가타리〉는 각각 호겐(1156)·헤이지(1159)의 난을 다룬 것으로, 한자를 섞은 간결한 문체(와한혼효문[和漢混交文 : 일한 혼합문])로 무장의 활약상을 영웅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주인공은 새로이 역사에 등장한 무사계급이었으나 그들은 이 2차례의 난에서 귀족간의 정쟁에 이용되었을 뿐이다. 〈헤이케 모노가타리〉는 헤이안 말기부터 가마쿠라 초기에 이르는 미나모토 씨[源氏]와 다이라 씨[平氏]의 싸움이라는 역사의 격동을 다이라 씨 일문의 흥망에 초점을 맞추어 묘사한 장편 군키 모노가타리이다. 〈헤이케 모노가타리〉의 최초의 형태는 1220년경에 이미 성립되었고 작가는 시나노[信濃] 지방의 전(前)장관이었던 유키나가[行長]로 알려져 있으며, 지방 각지를 순회하던 장님 비파승에 의해 유포되어온 구송문예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헤이케 모노가타리〉는 제행무상(諸行無常)·성자필쇠(盛者必衰)라는 불교적 무상관을 기조로 하여 사건과 인간의 행동을 인과응보의 이치로 분석해보인 점에서 일반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문장은 한자를 섞어 쓴 한혼효문이나 장면에 따라 서정적 문장을 쓰는 등 운율적이다.

14세기 초엽 140년간 지속된 가마쿠라 바쿠후가 무너진 후 남조와 북조의 대립항쟁이 일어나 60년에 걸친 전란이 전국을 휩쓸었다. 〈다이헤이키 太平記〉는 이 동란시대를 그린 40권에 이르는 장편 군키 모노가타리이다. 잇달아 계속되는 싸움과 그에 따르는 용맹하면서도 비애에 찬 인간의 모습이 호쾌하고 화려한 필치로 묘사되어 있다. 작가는 고지마 법사[小島法師]라는 설이 있으나 아마도 여러 사람에 의해 씌어져 나간 것으로 짐작된다. 작품성이 〈헤이케 모노가타리〉에 미치지는 못하나 유교도덕으로 말세를 개탄하고 위정자를 비판하는 등 새로운 시각을 엿볼 수 있다. 그밖에 주목할 만한 것은 군키 모노가타리에서 파생된 영웅전기 모노가타리이다. 〈소가 모노가타리 曾我物語〉· 〈기케이키 義經記〉 등이 대표적이며 후대에 미친 영향도 크다.

 

설화·일기·수필, 기타 문학

이 시대 전기(前期)에는 설화가 활발히 수집·편찬되었다. 귀족의 고대 동경, 신흥계급의 지식욕, 불교의 창도(唱導), 신흥계급 계몽을 위한 훈몽사상(訓蒙思想) 등이 작용했던 것이다. 귀족계층의 〈우지슈이 모노가타리 宇治拾遺物語〉(1213~21경)·〈고콘초몬주 古今著聞集〉(1254), 무가의 〈짓킨쇼 十訓抄〉(1252) 등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으며, 귀족계층의 일화나 불교의 영험담·둔세담(遁世談)이 많고 서민에 관한 민간설화가 수록된 점이 주목할 만하다.

중세의 일기문학은 전대의 여류일기만큼 우수한 작품은 없다. 궁중나인의 일기로는 다이라 씨 몰락기의 한 여성의 비애를 그린 〈겐레이몬인 우쿄노다이부슈 建禮門院右京大夫集〉, 지극한 모정(母情)이 호소력있게 다가오는 〈이자요이 일기 十六夜日記〉, 애욕의 적나라한 고백을 기록한 〈도와즈가타리 とはずがたり〉 등이 있다. 이에 대해 남성 귀족의 한문일기에도 주목할 만한 것이 있는데 후지와라 가네자네[藤原兼實]의 〈교쿠요 玉葉〉, 후지와라 사다이에[藤原定家]의 〈메이게쓰키 明月記〉(1180~1255), 가마쿠라 바쿠후 서기(書記)들이 쓴 〈아즈마카가미 吾妻鏡〉 등이 그것이다. 사이교를 비롯해 수많은 문학가가 출가·둔세하여 초암에서 시가를 음영(吟詠)하는 한편 훌륭한 수필문학을 남겼다. 대표적인 것은 가모 조메이[鴨長明]의 〈호조키 方文記〉(1912), 요시다 겐코[吉田兼好]의 〈쓰레즈레구사 徒然草〉(1330경)이다. 〈호조키〉는 먼저 무상한 세상과 허무한 인간의 모습을 그린 뒤 천재와 동란에 의해 일어나는 비참한 도시생활의 양태를 기록함으로써, 후반의 초암생활의 편안함과 대조시키고 있다. 〈쓰레즈레구사〉는 인생의 갖가지 모습을 붓 가는 대로 기록한 수필이다. 난세를 살아온 인간의 시선이 사회생활 구석구석에 미치고 있는데, 그것이 모두 작자의 예리한 감수성과 판단력에 의해 선택·서술되어 있다는 점에서 특이한 인간기록이라 할 수 있다. 〈호조키〉·〈쓰레즈레구사〉는 전대의 〈마쿠라노소시〉와 일본 수필문학의 쌍벽을 이룬다.

 

노[能]·교겐[狂言]

중세시대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 중에 하나는 극문학의 성립이다. 남북조의 난은 서민문화를 부각시킴으로써 렌가가 성행하게 되었는데 노와 교겐도 같은 경위로 출현한 예능이다. 노·교겐의 원류는 전대부터 있었던 사루가쿠[猿樂]이다. 가마쿠라·남북조 시대에는 사루가쿠와 가무 중심의 덴가쿠[田樂] 등을 직업적으로 하는 단체 자[座]가 다수 출현하여 사찰과 신사(神社)의 보호를 받으며 서민들 사이에서 성장해갔다. 많은 예능인 중에서도 유자키 자[結崎座]의 간아미[觀阿彌]는 덴가쿠·사루가쿠의 장점을 종합하여 새로운 예술인 노가쿠[能樂]를 완성시켰다. 는 연기자의 대부분이 가면을 쓰는 일종의 가면극으로서 춤과 창(唱), 반주효과를 내는 합창(지우타이[地謠]라 함)과 북·피리 등으로 이루어지며 독특한 구조의 무대에서 진행된다. 요쿄쿠[謠曲]는 노의 각본을 말한다. 간아미는 노의 명수(名手)인 동시에 뛰어난 연출가·각색자·작곡가였다. 노가쿠를 더욱 발전시킨 것은 그의 아들 제아미[世阿彌]였다. 작가·연기자로서 탁월한 재능을 가졌을 뿐 아니라 고도의 예술론을 써 이론과 실천을 체계화함으로써 노가쿠를 예술적으로 완성했다. 〈후시카덴 風姿花傳〉(1400~18)·〈가쿄 花鏡〉(1424)·〈사루가쿠단기 申樂談儀〉(1430)는 특히 뛰어난 연극론이다. 교겐은 노와 같은 무대에서 공연되는 예능으로, 노와 더불어 성장했다. 노가 장중하고 우아한 가무극으로 주인공이 전설 중의 인물인데 반해, 교겐은 대화와 동작으로 된 현대적·사실적이며 풍자·해학이 풍부한 구어 희극이다. 따라서 노는 귀족적, 교겐은 민중적이라 할 수 있고 노와 교겐은 전통적 귀족문화와 신흥 서민문화의 종합체라는 점에서 중세문화의 전형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