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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아사달시대(단군왕검 조선)-5

지식창고지기 2010. 2. 16. 09:40

서기전1652년에 고유(석유)를 채취하다!!!

 

서기전1652년에 15대 벌음단군이 약수(弱水)에 행차하여 우속에게 명을 내려 금, 철, 고유를 채취하게 하였다.

여기서 금과 철은 거의 일상사와 다름없으나, 고유는 지금의 석유인 원유로서 그 채취하는 방법이나 기술이 당시에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이에 앞서 서기전1846년에 송화강가에 기계공장을 만들어 배와 기계를 만들었다 하며, 이때 대표적인 발명품에 양수기(揚水機)가 포함되어 있다.

양수기는 물을 퍼 올리는 기계인데, 논에 물을 대거나, 바다부근에서 바닷물을 끌어다 소금을 만들 때 쓰는 양수기가 된다.

이 양수기를 응용하여 땅을 수직으로 파서 원유를 캐 올리는 방법이나 기계가 있었을까?

지금의 생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인간의 사고력은 당시와 지금이 거의 다르지 않다.

단언하는 바, 서기전1846년경에 양수기 등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 200년이 지난 서기전1652년경에는 석유를 캐는 기계도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본다. 즉 원유를 채취하였다는 기록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고대중국이 한배달조선의 역법을 가져가고 하은주와 단군조선 사이에 문화교류가 있었고, 문자교류가 있었음을 볼 때, 기술의 교류도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리하여, 고대중국의 기록에서 만약 양수기나, 석유를 채취하는 기계에 대한 기록이 있다면, 이는 필시 단군조선에도 이미 있었다는 결론이 된다.

땅의 표면이 다른 곳과 달라서 조사를 하여 보니 석유였다면, 당연히 그 연유를 알아 보았을 것이고, 그것에 전담연구자가 있다면 석유를 채취하는 기계를 발명하였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 이야기가 된다. 즉 시추기계를 제작하여 사용하였다는 결론이 된다.

발명은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즉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이다. 단군조선 시대의 과학을 절대로 얕게 봐서는 안된다. 이미 서기전3897년경에 지금의 태양태음력과 같은 달력이 만들어졌다라는 사실을 아는지!!! 아니 서기전7197년경 파미르고원에서 사방분거할 당시에 이미 기본적인 달력 즉 역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파미르고원시대인 서기전27179년에 해당하는 시기에 이미 역수(曆數)가 시작되었다라고 기록되고 있기 때문이다. 

파미르고원 시대에 이미 사방에 무엇이 있으며 지리가 어떠하며 어떤 인간들이 사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당시 파미르고원은 성곽의 나라로서 세계의 중심이 되는 수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인구급증과 식생활변화가 사방으로 분거한 이유의 하나가 된다. 이때가 서기전7197년경이다.

이후 약1,000년에걸쳐 정착이 이루어져 정착문명이 시작되었다. 그 대표적인 문명의 예가 요하문명이다. 수메르문명과 인더스문명이 아마도 서기전5000년 이전부터 시작되었다라고 보아야 한다. 요하문명이 서기전6000년 이전부터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달력은 파미르고원에서 사용하던 달력이 있었고, 이후 한국, 단군(배달)에서 다시 정비하여 사방으로 전파하였으며, 단군조선 초기에도 요임금이 배달나라 역법을 폐한 후 순임금과 달력을 협의하여 맞추었다.  한배달조선에서는 달력을 일방적으로 사용하도록 하지 않고 협의하여 위도와 경도에 맞게 조절하였던 것이 된다.

하나라 이후 중국은 독자적으로 달력을 만들어 쓴 것으로 된다. 그래서 서기전842년까지는 엉망진창이다. 역수와 간지가 맞지 않는다. 서기전841년이후에 비로소 맞는 것이 된다. 그 이전의 기록은 단군조선의 기록과 맞추어야 정확해진다. 그래서 추정컨대, 중국이 가지고 있던 죽서기년, 책부원구, 사기 등 다른 기록과 당나라가 빼앗아간 고구려가 소장했던 역사서를 참고하여 간지를 맞추어 연대를 맞추었다고 본다.

왕력을 계산하여 간지를 맞춘 것이 북송 시대 소강절(서기1011년~1077년)의 황극경세력(皇極經世曆), 북송의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  원나라 김이상(서기1231년~1303년)의 통감전편(通鑑前編), 남송의 정어중(서기1140년~1162년)의 통지(通志)이다.

[역사 기술 연대기간]
자치통감 : 서기전403년~서기959년
황극경세력 : 서기전2357년~서기전842년(~404년)
통감전편 : 서기전2357년~서기전404년
통지 : 서기전2698년~서기전2358년

단군세기를 위작이라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단군세기의 기록은 절대 위작이 아니며, 사실 그대로 적은 것이고, 일부 가필이나 오기가 있을 수는 있다.

고구려 멸망 이후에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 관련 역사는 단군조선의 역사를 적은 기록을 보고 적은 것이 아니고 중국의 기록을 보고 적은 것이기 때문에 간지나 연대가 맞지 아니하는 것이다. 우리의 원기록을 보지 못하고 중국의 기록을 보고 적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천문에 기초한 달력을 만들고, 과학기계를 발명한 것 등 한배달조선의 문화 내지 문명의 정도를 고려하면, 서기전1652년에 석유(원유=고유)를 채취하였다는 기록은 사실이라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