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종교와 사상
Ⅰ. 서 론
논어에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ꡒ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하니 지혜로운 사람은 동적이며 어진 사람은 정적이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사람은 기쁘게 살며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ꡓ위의 논어구절을 살펴보면 중국의 정신적인 면을 이야기 한다고 볼 수 있다. 물을 해양으로 산을 대륙으로 본다면 지자는 해양문화를 가리키고 인자는 농업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해양문화가 동적이라면 대륙문화는 정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중국은 공업이나 상업보다도 농업을 중시해왔다. 그래서 앞에서 언급한대로 정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농업문화란 대체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남의 것을 약탈하기 보다는 생활터전 안에서 자급자족하는 방식을 택했으며 한곳에 살면서 자연의 섭리를 혜택 받기를 원했다. 중국은 하늘이나 땅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기에 천인합일이란 말이 나온 것 같다. 농업은 순환의 원리를 가지고 있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오고 봄이 가면 가을이 온다는 자연의 순환 이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또한 인식론이 발달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내향적이다 또 하나 더 거론하면 가족 중심적 혹은 혈연 중심적이다.
중국의 사상을 들여다보면 유가가 전면에 나오기도 하고 도가가 전면에 나오기도 한다. 불교가 전래된 이후 불교도 영향을 끼치지만 중국의 주류는 도가와 유가이다. 유가와 도가가 추구했던 궁극적인 목적은 내성외왕이었다. 인격을 밖으로 사회화시켜 이상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유가나 도가는 모두 농사꾼의 철학으로서 가족제도가 성립되었고 주나라 이래로 인륜을 최대의 덕목으로 삼는 나라가 되었다. 중국을 대표하는 사람으로는“ 차 두부 오 선생” 인데 그는 치밀하게 계산 하거나 따지지 않고 대충 대충 하는 성격을 지녔다 .이 성격은 중국을 대표하는 성격이라고 볼 수 있다. 과학적으로 따지지 않고 안으로 인격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여 최고의 인격을 밖으로 표출시켜 이상사회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지금 바쁘게 돌아가는 세태에 중국의 공자나 노자의 이야기를 듣거나 책을 읽으면 머리를 끄덕이는 것으로 보아 같은 동양권의 나라로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의 모든 사상은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천하지대본을 경영하면서 농사를 통해 이상을 실천하려고 하는 농사꾼의 철학이다.
유불도 삼교를 돌아보면 다같이 중국 국민의 정서 정치와 아울러 중국이라는 거대한 나라를 위해 존재함을 알 수 있다. 무제는 유가의 각 경전마다 전문가를 뽑아 관리함으로써 유학과 정치의 연결고리를 만들었다. 유가가 너무 득세하자 공자를 신격화 하는 작업과 함께 위서라는 책을 만들었다. 금고문 논쟁은 한나라가 유교를 관학으로 정하고 통치 권력과 관련하여 통치권을 강화하거나 견제할 목적이 담겨있다. 삼교는 남북조 시대에 제일 논의가 많이 되었었는데 수가 중국을 통일하자 불교가 점점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반대로 유교는 쇠락해갔다. 도교 또한 유교와 마찬가지로 쇠락해가는 추세였다. 명대에서는 삼교가 복합성을 가지게 되는데 불교는 태조나 태종의 지지를 얻어 부흥하는 계기를 얻게 되나 세조가 도교를 과신하게 됨으로써 다시 철저한 박해를 받게 된다. 유교도 태조 태종의 세력을 얻어 부흥하게 되는데 특히 현종 때에 더욱 융성하게 된다. 유불도 삼교를 통하여 중국의 정치경제와 아울러 융합되고 흡수된삼교의 특징과 장단점을 논지해 보고자 한다.
Ⅱ. 중국사상의 원류
1. 중국 융합된 문화
중국 하면 가장 부러운 것이 땅이다. 어떻게 그렇게 많은 땅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부러웁기만 하다. 중국 민족은 처음에는 다른 민족과의 전쟁을 하여 많은 지역을 확보하여 중화민족이란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때부터 유목민 중국인의 조상인 고대 한족은 집약적 농업민족이 되었다. 3천여 년 전 은나라 때부터 농사를 지어온 중국은 황하중하류와 양자강 중하류의 지리환경과 깊은 관계가 있다. 황하유역은 토질이 성글어 개발하기는 쉬우나 기후가 건조한 편이였고 비도 고르게 내리지 않아 재해를 입기 쉬웠다. 그러나 양자강 유역은 기후가 비교적 안정되어 있었고 비도 많이 내렸으나 벼를 경작하기 위해서는 관개시설이 필요하였다. 황하중하류는 가뭄을 막고 수분을 보존하는 일이 핵심이 되었고 양자강 중하류에서는 물을 잘 소통 시키는 관개작업을 핵심으로 하는 집약적 경작제도가 실현되었다. 이로 인해 토지가 작게 나뉘고 일가일호 방식의 경영과 생산으로 분산적이며 개체적인 특색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은 개체의 불안정과 집단의 안정성이 결합하여 인간관계에서 개체를 집단과 결합하여 보다 나은 부분의 대륙집약형 지리적환경위에 사회가 형성되어 전통문화는 아래와 같은 문화적 특징을 지니게 된다.
첫째 현세성을 들 수 있다. 생활의 안정을 유지하는데 신비한 운명이나 우연한 기회는 생각지 않았고 현세에다 목적을 두었기 때문에 내세에 기대도 걸지 않았으며 추상형의 신은 만들지 않았다. 조상 혹은 윤리관계를 잘 처리한 사람이 추앙을 받았다. 중국의 사상과 주류를 점하는 유가는 현세를 중시하는 사상을 가졌고 불교는 중국화 된 이후에는 현세성이 더욱 강화되었으며 토착사상인 도교도 더욱 현세적이 되었다.
둘째로 실용성을 들 수 있다. 중국인의 의식 속에서 우주의 본질이나 추상적인 사고는 발견하기 어려우며 본체론적 사고방식도 윤리학설의 발전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셋째로 경험성을 들 수 있다. 한족의 사고방식은 경험적이며 실증적이었다. 논리적 추리를 하지 않으며 옳고 그름을 검증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넷째로 인간사의 중시를 들 수 있다. 양자의 대립이 아닌 화해 협조를 중시했다. 개인을 중시하거나 개성을 중시하지 않았으며 개인은 집단을 구성하는 하나의 단위로 간주되어 중국의 문화는 이러한 색채의 영향을 받아 나름의 특색을 지니게 되었다.
중국은 간단한 도구에 의존하는 생산구조이다 구성원 사이에 단순한 교환관계만 있을 뿐 분업관계는 없다. 농업을 기본단위로 하기 때문에 사람 수가 많은 것을 원했다 그래서 자손을 많이두었다. 가족의 결속을 위하여 효를 중히 여겼다. 중국의 문화나 사상이 지금도 머리를 끄덕이게 하는 것은 동양권에서 효를 중심으로 이어져왔기 때문에 앞에서 말한 현세성, 실용성, 경험성과 아울러 거대한 중국을 이끌고 나갔다고 볼 수 있다.
유교는 하늘과 땅 사이에 인간의 수양과 완성을 중시하는 인본주의, 도덕중시, 현실중시,를 들고 있으며 도교는 반대로 자연을 중시하고 인본주의를 부정하며 ,불교는 緣起적 세계관 주체적 인간관 평등적 세계관이 문화의 틀 속에 자리매김했다고 해석해본다.
2. 중국의 전통과 경제
정치와 경제는 우리 인류가 살아가고 발전하는데 적지 않은 관심거리였다. 문화와 종교는 대체로 정치와 경제를 떠나서 따로 존재할 수 가 없었다. 고대 중국에서는 물질적인 면과 인구적인 면이 서로 제약을 받으면서 이어져 왔다. 대가족제도와 효의 강조는 물질과 지식이 낮은 수준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실용성 의존성으로 말미암아 경제발전에 방해요인이 되었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이 구조가 발전을 가져왔으나 전제주의가 강화됨에 따라 중국사회의 발전을 저해하였던 것이다. 사마담은 사상을 유가 도가 묵가 법가 명가 음양가로 나뉘었고 유흠이 농가 종횡가 잡가 소설가를 더하였다. 이 사상들은 모두 중국을 어떻게 증식시킬 것인가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사상들은 모두 현실적 대안으로 제시되었고 이후 종교발전과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도가와 유가 도가와 명가 사이에 대결의식이 보였으며 맹자는 묵가와 농가 등을 비판하였다. 법가사상은 유가 도가 묵가를 종합한 모습을 보인다. 부국강병을 목표로 둔 법가는 진나라가 받아들여 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중국 봉건사의 기본적인 경제구조는 개체농업과 가내수공업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는 밭 갈고 여자는 베를 짠다. 이러한 구조는 인제나 자연재해를 통제하기에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미약한 존재다. 또한 지주경제와 소농경제의 결합으로 토지국유제와 사유제가 결합되어 있다. 농민에게 토지를 빌려주고 곡식으로 지세를 받는 제도가 있다. 지주 경제의 특징은 현물지세와 토지겸병을 통해서 농민들을 끊임없이 소작농으로 만든다.
지주가 소작농에게 농토를 빌려 줌으로써 1가 1호가 되게 만들었다. 지주와 소작농 사이에는 주종 관계뿐 아니라 경제적인 영역을 초월하는 영향을 발휘하여 지주는 상품경제 발전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었다.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는 정책과 농업을 뿌리로 여기고 상업을 곁가지로 여기는 관념이 나오게 되었다. 중국사회는 지주경제와 소농경제가 영향을 주면서 원만하게 발달되어 왔다. 고대 중국의 가정은 효를 가장 원칙으로 하며 군주를 중심으로 지방조직에까지 충과 효라는 개념이 윤리범주와 정치 범주로 대표 한다. 이것이 바로 삼강오륜 이다. 자신의 수양하고 나서 집안을 가지런히 하고 그런 다음에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다스린다는 관념아래 가족과 국가를 일체로 보았다. 국가는 군주 가족의 국가이기 때문에 사대부를 중요시 여긴다. 사대부란 지식인 관료 즉 문관으로서 학문 활동과 정치 활동이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봉건사회는 국가관계와 군신관계는 가족관계와 부자관계의 연장이었다. 전통적 윤리 관념인 삼강오륜을 적용함으로서 강력한 군권을 유지하였다. 전제군주와 정치구조는 상호작용을 하였다. ꡐ삼강은 가족윤리와 정치윤리까지를 하나의 틀로 연결하며 자신을 수양하고 나서 집안을 다스리고 그다음 나라를 다스리라 하였다. 관료제의 핵심에 宗法제가 있는데 그 뜻은 종족의 법을 뜻한다. 이는 적장자를 중심으로 정치 경제특권을 大宗과 적장자 외에 계승하는 小宗으로 나누고 대종을 중히 여기는 제도였다. 이 제도는 지금까지 내려왔는데 봉건왕조가 家天下의 원칙을 세웠기 때문이다. 역대 왕조를 보더라도 군주의 권력이 신하의 권력보다 우위에 있음이 서양과 다르다고 하겠다. 지금까지의 경제가 이러한 구조로 내려왔지만 세계정세와 맞물려 중국도 자기의 이념만 내세우는 국가가 아니라 적과의 동침을 해서라도 경제부흥을 꾀하는 나라가 되었다. 자국의 경제와 맞물려 정치위의 정치 부국강병의 길로 나서는 길이 살길임을 자각한다.
Ⅲ. 유불도 삼교의 특징과 장단점
1. 유교의 특징과 장단점
유가의 첫 번째 특징은 인본주의이다.
이것은 천에 관한 관심을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바꾼 공자에서 시작된다. 공자의 관심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향하였으며, 그 사람들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를 인으로 표현하였다. ‘인’이란 사람다움을 의미하며 구체적으로는 임금과 신한, 부모와 자식, 형제, 남편과 아내, 친구 사이의 관계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공자는 도에 대해서도 ꡔ논어ꡕ
ꡔ위령공ꡕ편에서 “사람이 능히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였고,ꡔ중용ꡕ에서 “도가 사람에게서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니 사람이 도를 행하면서 사람으로부터 멀리 한다면 도라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유가의 도는(人道)인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이어받은 맹자는 사람다움의 실현 근거로 성선설을 주장하였고, 순자는 인간 의 의지를 강조하였다. 그 뒤 성리학에서는 만물 가운데 가장 빼어난 존재를 인간이라고 보았고 양명학 또한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였다.
두 번째 도덕 지향이다.
유가는 인간의 욕구 중 도덕 욕구만을 인정하고 사적인 이익 추구를 철저히 배격하였다. 그래서 공자는ꡔ논어ꡕꡔ이인ꡕ편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데 밝은 사람은 군자이고,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데 밝은 사람은 소인이다”라고 했으며, ꡔ헌문ꡕ 편에서는 “이익 될 만한 일을 보거든 옳은가 그른가를 먼저 생각하라”고 하였다. 맹자는 이러한 생각을 이어서 인간의 도덕심과 자연 법칙을 일치시키고 생리적 욕구를 제외한 사단만을 인간의 본질적 요소로 인정하였다. 또한 성악설을 주장한 순자도 생리적 욕구를 극복하고 도덕적 실천을 일으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였다. 이와 같은 흐름은 성리학의 수양론으로 이어졌다. 특히 성리학은 만물의 본질을 리 로 규정하고 그 리로 도덕법칙으로 이해하였으며, 인간의 본성 또한 리라고 함으로써 도덕적 인간 주체를 확립하였다. 이와 같은 유가의 입장은 부도덕한 것이나 비도덕적인 것에 대한 강한 반발로 나타난다. 맹자가 양주와 묵적을 비판한 것이나 성리학자들이 불교와 도교를 비판한 것이 모두 이와 같은 관점에서 나왔다.
세 번째 특징은 강한 사회성이다.
유가에서 이상적이라고 생각한 인물은 자신의 도덕성을 사회에 온전히 드러낸 성인이었다. 공자는ꡔ논어ꡕꡔ옹야ꡕ편에서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고 많은 사람들을 구제 할 수 있다면 인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ꡓ라는 자공의 질문에, ꡒ어찌 인이라고만 하겠는가, 반드시 성의 경지일 것이다. 요순도 그렇지 못할까 봐 걱정하였다ꡓ고 답하였다. 이처럼 공자의 목적은 사회적 실현에 있었으며 그래서 공자 또한 자신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온 세상을 돌아다닌 것이다. ꡒ아침에 온 세상에 질서가 잡혔다는 소리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겠다ꡓ는 말 속에 공자의 강한 사회적 관심이 잘 드러나 있다. 그래서 유가는 항상 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지였으며, 그 기준은 ꡔ대학ꡕ이었다. ꡔ대학ꡕ은 자신이 가진 밝은 덕을 밝히고 나아가 백성을 세롭게 함으로써 완전한 사회를 이룬다는 세 가지 강령을 제시하였다. 이와 같은 생각이 수기치인이나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논리로 나타났으며, 그래서 정치ㆍ사회ㆍ교육 등에 중심적인 이론 근거가 되었다.
2. 불교의 특징과 장단점
불교의 첫 번째 특징은 연기적 세계관이다. 연기란 이 세상 모든 것은 그것이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다른 존재나 현상과 관련 없이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연에 의해 일어난다는 뜻이다. 그래서 ꡔ아함경ꡕ에서는 ꡒ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으며 이런 일이 생겼기 때문에 저런 일이 일어났다ꡓ고 하였다. 이처럼 불교는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존재 자체의 실체성을 전면 부정하고 있다. 근본불교의ꡐ제법무아ꡑ와 대승불교의 ꡐ공ꡑ은 모두 이러한 생각을 설명하는 개념들이다. 따라서 불교의 근본 관심은 존재론에 있을 뿐이며, 어떤 것을 절대화하는 시비 판단이나 윤리적 규범은 인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인간은 이처럼 끊임없이 변해 갈 뿐인 실체 없는 허상에 집착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의 말씀에 따라 연기의 원리를 깨닫는 것이 해탈로 가는 길이다. 이와 같은 연기적 관점에서는 창조론이나 환원론이 나올 수 없다. 다만 연기에 의한 변화를 강조함으로써 시간과 공간을 넘어 끝없이 순화하는 무한 우주관을 보일 뿐이다.
불교의 두 번째 특징은 주체적 인간관이다. 불교는 해탈 가능성과 현실의 고통스러운 생활 사이의 틈이 언제나 열려 있으며, 그 실현 여부는 오직 인간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본다. 인간은 모두 현재의 삶에 대한 책임과 함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본질적으로 그 삶의 고통을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도 신적 존재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의 노력과 의지로 만들어질 뿐이며, 자신의 행위나 생각은 반드시 그 결과가 자신에게 되돌아온다고 한다. 인과응보나 업보, 윤회설 등이 바로 그러하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은 자신만이 자기 삶의 완벽한 주인이자 책임자이다. 그래서 해탈을 밖에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찾는 것이며 이런 입장에서 불교를ꡐ자력종교ꡑ라고 한다. 범아일여(梵我一如)란 내 안에 있는 불성을 깨닫고 이를 바탕으로 모든 집착을 넘어서서 만물과 하나가 된 경지인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 때문에 유가로부터 현실을 긍정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고, 그 관념론적 성격 때문에ꡐ유심론ꡑ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세 번째 특징은 평등적 세계관이다. 불교는 모든 인간이 해탈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 만물이 윤회한다는 관점에서 보면 인간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해탈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며 나아가서 만물이 하나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평등적 사고는 또한 깨달음의 세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깨달은 사람을 가리켜ꡐ부처ꡑ라고 하지만, 이때의 부처는 먼저 깨달은 석가모니 부처와 대등한 또 다른 부처일 뿐이다. 이와 같은 평등적 세계관은 불교가 인도에서 발생할 당시 브라만교의 계급적 관점을 극복하면서 성립한 것으로서 역사적으로는 왕권의 인정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탄압을 받기도 하였다.
3. 도교의 특징과 장단점
도가의 첫 번째 특징은 인본주의에 대한 부정이다.
대부분의 사상이 인간을 중심에 둔 것과 달리 도가는 모든 불행과 혼란이 인간 중심주의에서 온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입장은 ꡔ도덕경ꡕ에서ꡒ하늘과 땅이 어질지 않아서 만물을 하찮은 것으로 여긴다ꡓ고 한 말이나, 장자가 ꡔ제물론ꡕ편에서 만물이 똑같다고 한 주장에 잘 나타난다. 노장 사상에서 말하는 도의 작용은 변화하며 만물은 다 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 변화에 순응하며 만물과 하나 되는 것이 도를 얻는 방법이기 때문에 인간을 만물의 주인으로 보는 것은 잘못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입장은 주관을 버리고 사물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사물을 볼 것을 강조함으로서, 의학을 포함한 자연과학 발전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인간을 자연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자연법칙에 따르는 것이 완전성을 얻는 길이라고 보았는데, 이러한 생각을 도교에 적용한 것이 연단술 이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에 대한 파악이 곧 천체에 대한 관측과 연관되었기 때문에 천문학의 발전에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도가의 두 번째 특징은 도덕 지향에 대한 부정이다.
ꡔ도덕경ꡕ에서는 다듬지 않은 통나무에 비유하고 통나무를 자르고 깎는 인위적 행위를 통해 물건을 만들 듯이 도가 무너져서 생긴 것이 예의 도덕이라고 보았으며, 그러한 시비 판단의 결과를 절대화시킴으로써 분쟁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지혜나 인ㆍ의ㆍ예ㆍ지 같은 도덕을 반대하였으며, 정치적으로도 백성들을 자연에 맡겨두는 무위의 정치를 주장하였다. 이 점은 장자도 마찬가지이다. 장자는 인간이 만물을 구분하는 근거가 도덕 판단에 있으며, 도덕 판단은 사물을 갈라보는 구분의식에서 나오고, 구분의식은 궁극적으로 나와 나 아닌 것을 가르는 데서 온다고 보았다. 그리고 현실의 법과 제도를 비롯한 모든 도덕적 규제는 자신의 관점으로 사물을 판단하고 획일화한 것이며, 이것이 고통과 비극을 가져오는 고삐와 멍에라고 보았다. 이와 같은 도덕에 대한 반대는 유가사상에 대한 부정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후대 성리학자들은 불교와 더불어 도가사상을 가장 중요한 비판대상으로 삼았다.
세 번째 특징은 평등지향이다.
도가는 모든 것이 상대적일 뿐이며 만물은 같다는 입장에 서 있다. ꡔ도덕경ꡕ에서는 ꡒ나쁜 일에 좋은 일이 덧붙어 있고 좋은 일 속에 나쁜 일이 숨어 있으며, 덜어 내는 일이 오히려 보태는 일이고 일이 곧 덜어내는 일ꡓ이라고 하였다. 장자 또한 삶과 죽음, 꿈과 생시, 아름다움과 추함, 옳고 그림을 모두 한가지로 보았고, 학의 긴 다리와 오리의 짧은 다리 가운데 어느 하나를 기준 삼아 다른 쪽을 늘이거나 자를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따라서 세상 모든 것은 어느 하나 다른 것보다 못한 것이 없으며,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까지도 다 각각의 존재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가난한 사람과 돈 많은 사람, 귀한 사람과 천한 사람, 오래 산 사람과 일찍 죽은 사람이 모두 같다는 입장으로 나타났으며, 계급질서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았다. 물론 이와 같은 생각이 노자나 장자에서 적극적인 실천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ꡐ황건적의 난ꡑ같은 역사상 많은 농민 봉기의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였다.
네 번째 특징은 개인주의와 신비주의적 경향이다.
노자와 장자는 사회적 명성보다 자신의 몸을 보존하는 데 힘썼다. 특히ꡔ도덕경ꡕ에서 보인 처세의 지혜가 장자에서는 내면의 수양을 통한 절대적 삶의 획득이라는 문제로 바뀌어 갔다. 잡혀 죽어서 신령한 거북으로서 화려하게 사당에 모셔지기보다 진흙 속에서 자유롭게 사는 거북이 더 낫다고 한 대답은 바로 그러한 장자의 생각을 잘 보여 준다. 이와 같은 경향은 현실 부정의 도피와 은둔사상으로 이어져 위진남북조시대에 죽림칠현 같은 풍조가 나타나 유행하기도 했다. 그들은 세상의 위선과 정치적 불안에서 벗어나 예의나 법도를 가볍게 여기면서 고상한 담론과 개인생활을 즐겼으며, 이러한 경향이 문인고 화가들의 예술정신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연단을 통해 신선이 되려고 했던 수련도교에서 개인주의와 신비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Ⅳ. 중국 새로운 시작
1. 동서 문물의 수용
세계 자본주의 대열에 낀 중국은 죽의 장막을 걷고 외부세계와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개방의 첫 단추는 정치와 경제 때문에 사상해방도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중국에서 볼때 서방에서 유입되는 사상은 비이성주의와 인도주의 사조였다. 인간의 가치와 존엄 인도주의에 대한 관심 인간성 회복 등이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같은 사조들이 대학가를 중심으로 유행하였다. 첫 번째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이념은 ꡒ인간을 중심으로 하며,인간이 마르크스주의의 출발점이자 귀결점 이라고 강조하였다. 많은 지식인들 사이에 싸르트르 와 니체는 공동화재로 등장하였다. 자아 선택, 절대자유, 의지의 초인간 은 청년지식인들의 눈을 뜨게 했다. 계급성 중시의 문학 작풍을 비판하면서 과감하게 문화혁명시기의 개인소개와 파면을 그린 작품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인들에게 문화란 밖으로부터의 충격을 논쟁을 통해 문화면에서 반성하고 제안을 통해 제기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위기나 전환기가 닥칠 때 마다 대대적인 문화논쟁 즉 일련의 사상투쟁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대처해 나가는 기본방침을 도출해 나갔다.1 982년에 시작되어 1990년에 이르기까지 진행된 ꡐ문화열ꡑ은 말 그대로 문화연구 토론의 불이다. 항상 중심주제는 중국과 외국문화 사이의 우열관계민족의 이데올로기 자본주의 수용문제 등이다. 근대이래 서구문명과의 충돌대응의 역사에 대한 반성 모 택동 사상 일변도에서 벗어난 다양한 학술발전자체의 요구이다.
2. 중국 문화와 종교의 시대구분
모든 종파는 상징적 설화와 비약을 연출하면서 연결고리를 가지려고 한다 모든 종교는 많은 보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적절하게 가감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틀을 만들 수 있다. 중국문화의 잉태기는 은주시대를 가리킨다. 중국문화의 정초기는 춘추전국시대를 가리킨다. 그리고 중국문화의 발전기는 한당 시대이다. 문화의 잉태기인 은주 시대에는 문화적 색채를 강하게 띠고 있다. 이 시기는 불완전한 유목생활로 종교와 미신에 의지하였으며 천명상제사상과 음양오행을 들 수 있다. 이사상은 조상신 숭배와 자연신 숭배를 겸하고 있다. 이때부터 중국은 왕조와 인간의 흥망성쇠를 하나의 도덕기준으로 삼았다. 주역은 인류사회의 뵥잡한 현상을 간단한 부호의 배열방식으로 개괄하는 것이지만 철학의 시작이라는 점이 의의가 있다. 은주시대의 천명사상과 음양오행설은 뒷날 중국문화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춘추전구기대는 생산력이 발전하면서 사상문화 영역에서 제자백가가 나와 각 학파가 나와 중국문화의 기본 틀을 형성하였다. 중국문화의 발전기는 진한부터 당대까지이며 문화의 특징은 제도화 형식화 양식화이다.
중국문화의 강화기는 송 명 청 시대를 의미한다. 성리학이 이 시대의 대표적 사상 이였으며 흥망도 당대의 정치 경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봉건경제가 발달하였고 지주토지사유제와 상공업도 발전 하였다. 경제발전으로 말미암아 지주의 권력이 약화 되었다.토지겸병의 확대는 농민과 지주 사이를 악화 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성리학은 유불도 삼교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그리고 청나라 말기에 근대로 이어진다. 이 시기는 구문화와 신문화가 충돌 융합하는 시기이다. 과학 기술을 배척함으로써 서구에 무릎을 꿇고 만다.5.4 신문화 운동을 바탕으로 중국문화의 자기정체성인 중화주의를 근간으로 중국문화와 타문화를 융합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 또 중국은 새로운 시대로 발돋움하고 있다.
Ⅴ. 결론
지금까지의 고찰을 통해 유불도 삼교가 어떻게 들어오고 받아 들여졌는지 알아보았다. 큰 틀에서 볼 때 종교는 우리 인간들이 살아갈 때에 뗄래야 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았다. 유가 그리고 불가와 도가의 관계는 존재론적 관점과 자각론적 관점에서 볼 때 분명히 드러난다. 逆生 陶成의 관점에서 유불도 삼교를 보면 도가를 통해 현상 사물의 존재 근거가 형이상의 도이기 때문에 인간이 도를 근거로 해야 산다는 것을 깨닫고 불가를 통해 현상적 세계를 초월하여 형이상의 도에 도달하는 것이 인간심리의 내적 초월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불가를 통해 인간 본래성의 자각을 바탕으로 형이상의 도에 도달함을 알게 된다. 학문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본다면 도가를 거쳐 불가에 도달하고 불가를 거쳐 유가에 도달하게 된다. 倒生 逆成 의 관점에서 삼가의 관계를 본다면 도가로 시작하여 불가를 거쳐서 도가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도생 역성의 관점은 유가의 관점에서 실천론을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도가와 불가가 지향했던 세계가 바로 유가와 신도의 세계임을 알게 된다. 한나라 말기에 이르면 도교 불교가 자리를 잡는다. 그리고 도교와 불교는 병을 치료하는데 일조를 한다. 도교는 예부터 내려온 민간신앙과 합하여 도가 유가 묵가 등을 받아들인 민간종교이며 노자를 교조로 내세웠다. 태평도와 오두미도는 기도와 주문으로 병을 고쳐주었다. 불교도 민간인들에게 크게 받아들여져 깊이 종교로 자리 잡았다. 이민족들이 북방을 차지하게 되면서 중국인들이 약해져 있을 때에 불교가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불교가 들어올 때에는 전통사상의 개념을 빌려서 이해하는 의탁불교가 생겼으며 불교용어와 짝을 맞추며 이해하는 격의불교가 나타났다. 또 한나라의 몰락과 함께 유교가 침체되었고 도덕경, 장자, 주역사상이 자리를 잡았다. 이런 틈을 타 사대부들의 그림 음악 붓글씨 등이 유행하게 되었다. 수당 대 에도 도교 불교가 발전 하였다. 송나라에 이르면 유불도 삼교의 결과로 성리학이 나온다. 중국의 종교사상이 가장 왕성한 시기는 춘추전국시대로 제자백가시대 라고 불리는 다양한 사상을 전개하였다. 각 나라마다 종교를 가지고 대립이 되어 같은 민족끼리 서로 살상하는 이 시대에 그래도 우리나라는 다양한 종교가 서로 공존하여 다행으로 생각한다. 이제 중국도 유불도 삼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도 들어가서 다양한 문화를 흡수하며 종교까지도 흡수하는 시대가 되었다. 자연과 인간이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살피는 일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중국사상의 주류를 이루었다. 이 지구상에 가장 중심에 있었다고 자부하던 중국은 이데올로기 사상으로 말미암아 후진국으로 퇴화 되었었다. 삼교가 융화하듯이 경제적인 면에서도 종교적인 면에서도 융합하며 중국은 제일의 잘사는 나라로 지금도 발돋움 하고 있기에 우리 국민들도 정신을 가다듬고 선진대열에서 뒤떨어지지 말아야 할 것 같은 다짐이 든다.
參 考 文 獻
공 상철 외, ꡔ중국,중국인 그리고 중국문화ꡕ, 다락원,2001
ꡔ지상강좌ꡕ,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2003
배 종호, ꡔ한국유학사ꡕ, 연세대출판부, 1981
편집부편부 ꡔ동양사의 기초지식ꡕ, 신서원, 1991
김 용대, ꡔ중국사상사ꡕ, 조성율 옮김,이론과실천, 1986
김 교빈 외, ꡔ중국의 종교와사상ꡕ, 방송대출판부, 2003
송 항룡, ꡔ동양철학의 문제들ꡕ, 여강출판사, 1987
조 민환, ꡔ중국철
'Blog·Cafe > My Love China'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국 종교․사상의 갈래와 흐름 (0) | 2010.03.19 |
---|---|
중국의 종교와 사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0) | 2010.03.19 |
중국인들은 어떤 종교를 믿을까? (0) | 2010.03.19 |
중국의 종교와 사상 요점정리 (0) | 2010.03.19 |
중국의 종교와 사상 요점2(도표) (0) | 2010.03.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