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들은 어떤 종교를 믿을까?
중국 최대의 전통명절인 설이 다가온다. 중국에서는 설날을 춘지에(春節)로 부른다. 중국에서 춘지에는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춘지에가 시작되기 한달전에는 농민공 등 고향을 떠나 살던 이들이 귀성을 한다. 앞으로 바뀌지 모르겠지만, 중국의 귀성 본능은 우리보다 휠씬 강한 것 같다.
멀게는 일주일 이상 걸리는 고향에 가서 꼭 춘지에를 보내겠다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몰려드는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이 춘지에의 시작을 알리고, 또 설날 몇일전부터 시작되는 폭죽놀이는 춘지에 날 절정으로 치닫는다. 어지간한 전쟁폭음은 소리 축에도 못끼는데 이 소리를 듣고 잠을 잘 수 있는 외국인들은 거의 없다. 폭죽놀이는 설날 이후 5일 단위로 계속되다가 보름인 15일에 끝을 맺는다.
이 밖에도 춘지에를 전후해서는 복복(福)자를 써서 거꾸로 붙이는 다오푸(倒福)를 비롯해 다양한 풍습이 있다. 그런데 이 풍습을 보고 있노라면 중국인들은 도대체 무슨 종교를 갖고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사실 중국에 건너올 때까지만 해도 중국 사람들은 상당수가 불교나 유교를 신봉하리라고 생각했다. 또 우리처럼 종교간에 갈등이 없겠냐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지에서 보는 중국인들의 종교관을 보면 상당히 놀라게 된다. 종교에 대한 어떤 절대적인 믿음이 극히 드물고, 타 종교에 대해 포용적이라는 점 때문이다. 물론 조선족 동포만은 극히 예외적이라고 한다. 중국은 사회주의 국가지만 종교에 대해 절대적인 탄압을 하지 않는다. 물론 티벳의 분리운동을 주장하는 일부 장족불교나 파룬궁에 대해서는 정부가 강압적으로 포교나 집회를 금지하지만 다른 종교의 경우 그렇게까지 강하게 탄압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공자(孔子) 등 유가(儒家)의 위인들을 숭배하는 유교(儒敎)를 숭상할 것 같지만 중국에서 유가는 그저 제자백가의 한 분파로만 인식되고 있었다. 물론 한(漢) 시대에 공자가 왕의 권위를 능가하는 종교적인 인물로 추대된 적이 있지만 이후에는 그런 공자도 수없이 해체되면서 종교적인 색채를 띠기에 너무 평범해졌다. 또 일반에서 유교에 대한 숭배를 찾기는 쉽지 않다. 공자의 고향인 취푸(曲阜)에 가도 그가 거대한 위인으로 비춰지지만 종교적 높이로까지 숭배되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유가의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다. 가령 공자나 맹자 등 유가의 명인 들이 많이 태어난 산둥(山東)성 지역은 가부장적 권위가 다른 지역에 비해 세다. 그 때문에 산둥성 남자들은 장가가는데 적잖이 애를 먹는다. 이미 가정내에서 동등한 지위를 확보하거나 오히려 우월한 지위를 확보한 다른 지역 처녀들이 산둥 남자를 유난히 꺼리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의 사상에 깊숙이 박혀있는 도교(道敎)도 종교로 숭배되기에는 적잖은 한계가 있다. 어느 지역에 가나 칭양궁(靑陽宮)과 같은 도교사원을 찾을 수 있지만 종교적인 색채가 상당히 감쇄된 느낌이다. 대부분의 도교사원에는 도사(道師)들이 있는데, 필자의 눈에는 어떤 권위보다는 그들이 점을 처주는 것이 재밌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중국인들에게 종교라고 말하면 당연히 불교를 먼저 떠올린다. 중국에 불교가 전파된 경로는 서북인도에서부터 아프카니스탄, 파키스탄 지방으로 전래된 북방 불교가 있고 더불어 수마트라섬과 말레이 반도를 우회하여 남부해로를 통하여 베트남을 경유하여 중국남부에 전해진 남방불교도 있다. 인도의 승려가 직접 중국에 와서 사찰을 세우고 불법을 전한 경우도 있지만 법현, 현장, 의정 등은 인도의 성지를 순례하고 불교 문화를 배워왔다.
하지만 유입 경로가 다르고 소승경전과 대승경전이 차례로 전해지면서 각자의 판단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불교가 전파됐다. 이에따라 자신들의 위치에 따라 나름대로 경전에 대한 가치판단을 하는 교상판석(敎相判釋)이 일반화되면서 중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관습이나 학문을 접목시키는 작업을 거쳤다. 이후 끊임없이 한족과 변방민족의 정권 교체 속에서 불교는 어느쪽에서나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했다.
이런 중국에도 기독교나 이슬람교가 들어왔지만 중국인들의 마음에 크게 자리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중국인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절대적인 신앙에 의탁하기 보다는 당장에 그들의 삶은 좌우하는 변수들이 중요했기 때문에 종교에 눈이 돌릴 시간이 부족했다. 뿐만 아니라 상대방에게 어떤 것을 강요하거나 강요받는 것 자체를 꺼리면서 서구 종교가 들어갈 틈새를 주지 않았다. 물론 그들에게 서구는 마약이나 강요하고, 자원이나 문화재를 강탈하는 존재였으니, 그들의 종교가 쉽게 수용되기도 힘들었다. 결국 중국에서는 어떤 특정한 종교가 헤게모니를 장악하지 못했다. 대신에 각 사상의 중층적으로 결합하면서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들어갔다.
이런 특성은 중국을 여행하다보면 어디서나 쉽게 느낄 수 있다. 산시성(山西省) 핑야오(平遙) 고성(古城)도 한 곳이다. 서주(西周宣王 기원전 827년? 782년)에 처음 쌓여진 이 성은 직경 4킬로 내외의 작은 성으로 완벽히 보존되어 있다. 우리나라에도 알려진 문화평론가 위치우위(余秋雨)도 유달리 좋아해서 자주 들렀던 이곳에서 눈에 띄는 것 가운데 하나가 종교다. 핑야오에는 중국 종교의 모든 것이 있다. 도교사원인 청허궁(淸虛宮)과 청황먀오(城隍廟)가 있고, 유가의 산물인 원먀오(文廟)가 있고, 성의 한켠에는 백년 가량 된 천주교 교당도 잘 보존되어 있다. 또 성의 양쪽에는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절인 전궈스(鎭國寺)와 수앙린스(雙林寺)가 있어 불교 문화를 꽃피우고 있다. 이 작은 고성 안에 수천년 동안 유교, 불교, 도교는 물론이고 근대에 들어온 천주교 성당까지 들어와서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이 중국 종교문화의 독특한 특징이다.
이런 특성은 어디서 나왔을까. 사실 우리가 역사를 배울 때, 몽고, 여진, 만주족 등 강한 군사력을 가진 소수민족의 정권이 결국에 동화된 이유를 놓고 다양한 해석을 한다. 보통은 한족 문화가 뛰어나서라고 하지만 그 보다는 모든 것을 흡수시켜서 자기화시키는 ‘블랙홀’같은 힘이 있기 때문이다. 중원에 자리한 한족들은 신체적으로 그리 강인한 민족이 아니다. 이는 중국역사를 보면 휜히 나온다. 한족이 중심인 주(周), 한, 수, 당, 송, 명 등의 국가는 지배기 극히 협소한 국가에 지나지 않은 과도기 국가에 가까웠던 반면에 원, 청 등은 소수민족이 지배세력으로 강성한 힘을 바탕으로 현대 중국의 위상을 상당 부분 만들었다. 한족을 중원이 지배하던 시대에도 한족들은 오랑캐라 불리던 변방 민족에 화번공주(화친을 위해 오랑캐의 왕에게 시집보내는 공주)를 보내고, 비단 한필에 지나지 않는 말을 비단 10여필을 주고 사는 등 항상 쫓기는 삶을 살아왔다. 당연히 공격성도 떨어지는데, 수나라나 당나라가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처들어 오다가 참패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반면에 이들은 서구는 물론이고 자체적으로 가진 문화를 흡수시켜 핵심을 뽑아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 당연히 그 분화는 ‘짬뽕 문화’에 가깝다. 한 예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유기(西遊記)를 보면 유교와 불교, 도교 등 모든 문화가 합쳐져 있다. 황제의 명으로 가는 것은 유교적인 반면에 천도복숭아, 옥황상제 등이 등장하는 것은 도교 문화고, 삼장법사 등 일반 배경은 불교적인 색채가 강하다. 이런 인상은 중국 대부분의 산에서도 쉽게 느낀다. 어느 산이나 불교사원, 공자를 모신 사당등은 물론이고 도교사원 등이 이웃해서 공존하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가장 강한 종교는 바로 ‘부’(富)다. 중국 여느 음식점에 가면 출입구나 계산대 뒤에 있는 차이선예(財神爺)를 만날 수 있다. 모두 돈을 많이 벌게 해주길 바라는 기원이 담겨져 있다. 또 오래된 도시에 가면 도교, 불교, 유교 사원에 못지 않게 볼 수 있는 것이 삼국지의 영웅 관우를 변형시킨 차이선먀오(財神廟)다. 오류의 역사로 평가받는 문화대혁명은 실질적으로 종교나 정치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중국인 들 내부에 상존하는 부자되고픈 욕망에 대한 폭압이었다. 이후 덩 샤오핑은 그 욕망이 있어야 굶어죽지 않아야 한다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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