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숨결/역사(중국)

남송(南宋, A.D.1127 ~ A.D.1279)

지식창고지기 2010. 5. 5. 19:00

(18) 남송(南宋, A.D.1127 ~ A.D.1279)


― 평화를 돈으로 사려다 야금야금 멸망한 남송


북송 멸망 후 1개월 뒤에 조구(趙構)가 남경(南京 : 지금의 하남성 상구商丘 지역)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송나라를 중건하니, 이로써 남송 시대가 시작되었다.


남송은 건립 초기부터 금나라와 대치했으나, 남송의 최고 통치자들은 (북송 시대부터 지속되어온) ‘안락함과 평화를 구걸하는 정책’을 계속하였다. 이 때문에 비록 이강, 종택(宗澤), 한세충(韓世忠), 그리고 악비(岳飛) 등 일부 장수들이 용맹하게 금나라와 싸워 승리를 얻었음에도, 남송은 1141년에 금나라와 ‘소흥화의(紹興和議 - 송나라가 금나라의 신하가 되어 매년 엄청난 액수의 조공을 바치기로 소흥 황제가 합의)’에 조인해 타협하였다. 이후 송나라와 금나라 양국은 동쪽으로는 회수(淮水)를 경계로 하고, 서쪽으로는 대산관(大散關)을 경계로 상대적으로 안정된 대치국면을 형성하였다.


하지만 결국 남송 말기에 이르러 간신들이 계속 정권을 잡으면서 조정에는 칠흙같은 암흑이 드리웠고, 이때 북방의 징기스칸이 건립한 몽골제국이 급속도로 강대해져 몽골의 철기군(鐵騎軍)이 남하, 서하와 금을 멸망시켰다.


1271년, 쿠빌라이는 국호를 몽골에서 ‘대원(大元)’이라 고치고, 그 후에 남송과 대규모 전쟁을 벌였다. 그리하여 1279년, 더 이상 달아날 길이 없게 된 남송 정권은 결국 육수부(陸秀夫)가 어린 황제를 안고 바다에 투신함으로써 멸망을 고했다.


남송이 강남으로 물러난 후에도 정치 및 사회 등 모든 방면에서 북송의 수많은 특징들을 계승하였다. 특히 정치 제도에서 상당히 완벽한 중앙집권제를 수립하였다. 이 시기에 중국 남부지역의 경제는 전에 없이 번성하여 방직업은 장족의 발전을 거두었고, 조선업 역시 매우 발달하였다. 도자기 제조, 제지업, 인쇄업 등도 북송시대의 그것을 뛰어넘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