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적 엽기 재판 ( 1 편 ) - 출두 명령
1978년 5월 의 어느 날, 사우디 아라비아 서부 항구 도시 제다( Jeddah) 의 어느 한적한 길목에 자리잡은 빛 바랜 콩크리트 단층
건물. 야외의 강한 태양 빛을 차단하기 위하여 쳐 놓은 커텐 때문에 실내는 우중충한 분위기 마저 감돌았다.
1 메타 가량 높은 단상위에는 아랍인들의 전통 의상을 입은 중년의 세사람이 근엄한 표정 으로 단 아래 사람들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단 아래에서는 역시 빠짝마른 중년의 사우디 인이 사우디 말로 빠르게 무엇인가 단 위의 세사람을 올려다 보며 호소를 하고 있다.
억양이 높낮이를 되풀이 할 때 마다 그의 두손은 공손하게 겹쳐지기도 하고, 때로는 양쪽 손바닥을 기지런히 펄쳐 보이며 무엇인가 간절히 호소하고 있다. 때로는 옆 테이불에 앉아 있는 동양인을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억양을 높이기도 했다.
단 위의 세 사람 중 가운데 사람이 가끔 반대 질문을 하기도 하고, 동양인에게 사실 확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양인으로 부터의 답변은 옆에 대동한 통역을 통하여 질문 내용을 확인 한 후 답변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연 되었다.
주로 빠짝 마른 중년의 일방적인 발언으로 어느 정도시간이 흐르자 단 위의 세사람 중 가운데 사람이 휴정을 선언 했다. 이렇게 해서 사우디 아라비아 제다에서의 세기적인 엽기재판은 시작 되었고, 첫번째 사실 심리( Hearing ) 가 막 끝난 것이다. 장소는 제다 법원 민사법정, 원고 사우디 왕가의 서열 11번째 왕자, 담당 변호사, 피고 한국의 H 건설회사 대표이사.
1978년 3월 어느날, 모 건설 회사의 사우디아라비아 제다 지사장으로 근무 하던 정 부장 에게 사우디 관공서의 문양이 새겨진 누런 봉투 하나가 배달 되었다. 수신처, 발신처가 모두 아랍어로 기재되어 있다. 여러 사람 손을 거쳤는지 여기 저기 손 때가 묻어 있었고 한 쪽 모서리는 꾸겨저 있었다.
섭씨 40도가 넘는 태양열을 피하여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정부장에게는 때 묻은 편지가 그리 중요하게 보이지 않았다. 책상 위 미결 함에 밀어 놓고 한 동안 잊고 있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났다. 조수로 일 하고 있는 사우디 현지인이 책상위 미결함에 있는 그 봉투를 발견하고 갑자기 긴장한 표정을 짓는다. 의아 해 하는 정부장에게 조수는 법원에서 온 공문이라고 알려 준다.
개봉하여 확인 한 바, 수신은 H 건설회사, 대표이사, 당년도 지정한 날 지정한 시간까지 제다 법원 민사 법정에 출두 하라는
출두명령서였다. 지정 된 날자란 물론 이스람월력에 의한 날자 임을 의미 한다. 출두 사유로는 " 왕자 "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 의 한 사실 심리 ( Hearing )라고 했다.
이 공문 내용은 한글을 알파벳으로 표기하는 암호로 표시되어 즉시 서울 본사에 테렉스로 전송 되었다 곧 이어 본사에서 국제 전화가 걸려 왔다. 그 당시 사우디의 국제 전화 시설이 열악하여 제다에서 교환원에게 국제 전화를 신청하면 보통 2-3 시간후에 연결이 되었다. 따라서 이쪽에서 싸인만 보내면 본사에서 전화를 걸어 오는 것이 정 해진 절차다. 본국으로부터의 국제 전화는 비교적 빠르게 연결 된다.
실무부장의 다급한 질문이 멀리 전화선을 타고 들려 온다. 테렉스로 보고 된 내용 이외에 보충 사항을 알아 내기 위하여 필사적이다. 실무 부장의 다급한 질문은 쉽게 이해가 간다. 현지 시간 오전 11시 50 분, 서울시간으로는 새벽 5시 50 분이다. 오전 7시 부터 시작되는 그릅 전체회의에 상정 할 안건을 정리 하는 시간 인 것이다.
오전 7시부터 열리는 전체 회의는 그릅 총수인 C 회장이 주관한다. 회의에 참가하는 인원 수는 70명내지 80명, 모두가 계열사의 회장, 사장, 부사장, 전무급 이상의 임원 들이다. 그릅사의 임원들은 C 회장을 그릅사의 다른 회장들과 구분하여 왕 회장이라고 불렀다.
사옥 12층에 마련 된 대 회의실은 그래서 매일 아침 때이르게 문전 성시를 이룬다. 그러나 C 회장이 들어서는 순간부터는 팽팽한 긴장감이 전체 회의장을 압도 한다.
해외 담당 실무부장의 업무는 오전 5시 30분 부터 시작 된다. 밤 사이 전 세계에서 보내온 200 여건의 테렉스를 4등급으로 분류하여, 역시 6시까지 출근하는 4명의 당일 당번들에게 번역을 시킨다. 테렉스의 송신처는 주로 중동의 각 현장과 뉴욕, 로스 앤젤레스, 런던, 프랑크프르트, 동경, 등 해외에 포진하고 있는 지사로 부터의 송신이다. 해외지사에서 송신되는 테렉스는 영문으로 작성되나 수 많은 중동 현장에서의 테렉스는 한글을 알파벳으로 표기하거나 암호화 한 전문이 대부분이다. 200 여건의 전문 중 한글로 번역 되는 전문은 1급 과 2급에 한 한다. 보통 20 여건에 달한다.
1급으로 분류되는 전문은 최고 경영층의 결재를 요하는 긴급하고 중요한 안건이다. 보통 10 건 내외가 된다. 해외 담당 실무부장은 상정 된 10건의 전문 내용을 완전하게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C 회장이 착석하면 원문과 번역문을 C회장 앞에 펼쳐놓고, 전체 회의에 참석한 70-80 명의 참석자가 모두 알아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전문 내용을 줄줄이 낭송을 한다.
보고자의 안건 낭송이 끝나면 C 회장의 근엄한 눈길이 해당 기업의 임원에게 쏠린다. 해당 임원은 지체없이 일어나 보충 설명과 함께 해결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전문 내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거나 해결방안이 미흡하면 당장 차거운 질타가 뒤 따른다. 조용하고 저음의 쇳소리 나는 질타이지만 머리 끝이 쭈볏하고 말초 신경을 자극 하는 질타 인 것이다. 불호령과는 차원이 다른 질책이다. 이 회의에서 심한 질타를 받은 임원은 순식간에 얼굴이 노란 색으로 변한다. 그리고 몇일 동안 불면증에 시달리게 된다.
전체 회의에 상정 된 안건은 즉시 해결 방안이 강구되어 당일 오후 4시 이전에 해당 지사나 현장으로 전달 된다. 모든 안건이 24 시간 이내에 처리 되는 것이다. 2급으로 분류 된 전문은 그릅사별 대표이사가 주관하는 간부 회의에 상정 되어 같은 절차를 밟아 지사나 현장에 지시 사항이 전달된다. 역시 24 시간 이내에 처리된다.
문서, 통신문 등의 보안 문제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루어 진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중동에 진출한 한국업체는 경쟁 상태에 있는 외국업체들 , 특히 유롭 업체들로 부터 일거수 일투족 감시의 대상이 되고 있었으며, 특히 사우디 전신국을 통하여 전송 되는 통신문은 외국인 들에게 쉽게 노출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우디의 전신 전화국은 미국 영국 유롭의 기술지원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기술 고문이 항상 주재 하고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외국 기술고문들은 경쟁 업체들의 전문을 쉽게 접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처하기 위하여 건설부에서는 한동안 매월 암호 코드를 만들어 중동에 진출한 국내 건설 업체들에게 배부 하곤 하였다.
당시 국내 건설 업체들의 중동 건설 시장 진출은 가히 독보적이었다. 한국인의 경쟁의식과 저돌성이 신시장 공략에 주효한 결과이다. 공사 건당 금액이 최소 미화 억불 단위이다 보니 경쟁의식과 저돌성은 곧 기업의 사활을 건 싸움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국내 업체들 끼리의 경쟁도 치열 하였으나, 특히 일본과 유롭 업체들의 한국 업체들에 대한 견제는 상상을 초월 할 정도로 심각하였다.
수시로 발주 되는 국제 경쟁 입찰에서는 경쟁업체의 동태를 정탐하는 첩보전이 시발점이 된다. 입찰 전에 우선 본 입찰에 참가하는 업체가 어떤 업체 인지를 알아내는 것부터 시작 된다. 발주처에서는 업체끼리의 단합을 막기 위하여 입찰 참가자 명단을 입찰서 개봉 할 때까지 극비 사항으로 취급한다.
입찰 참가 신청서( P/Q, Prequalification for Bid )가 마감되면 입찰자들의 발길은 바빠진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활동이 시작 되는 것이다. 뛰어 난 추리력과 풍부한 경험만이 첩보전에서 우위를 차지 할 수 있다. 뜻 밖의 운도 때로는 결정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입찰참가 신청서 제출이 마감되면 지사장이나 간부들은 하루에도 서너 번씩 발주처 사무실을 배회 한다. 어떤업체가 입찰 참가 자격을 획득 했는지? 입찰자 명단 입수가 불가능 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딪혀 보는 것이다. 발주처 실무자와의 접촉이 불가능 할 경우 서류를 나르는 사환이라도 눈 도장을 찍어 얼굴을 익혀 놓는 것이다. 다음 번 방문 때는 사환에게 줄 값나가는 선물을 지참하게 된다. 이 사환이 모든 서류를 복사하고 서류 심부름을 하기 때문에 의외로 원 하는 정보를 쉽게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류가 육중한 금고에 보관 되어 있다고 해서 반듯이 보안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사환과의 친분이 성사 될 경우 금고속에 보관되어 있는 극비 정보는 이미 내 손 안에 있는 것이다.
사환과의 친분이 실패 할 경우, 입찰에 참가 할 법한 업체 리스트를 만든다. 현지인을 시켜 사실 확인 작업에 들어 간다. 몇 번의 예행 연습을 거쳐 리스트의 한 업체에 전화를 건다. 물론 영어대신 사우디 말로 젊잖게 묻는다. " X 프로젝트의 발주처입니다. 귀사에서 제출 한 입찰 참가 신청서의 주소가 누락 되어 있어서 확인 하려고 합니다. " 전화를 받은 상대방 현지인은 잠시 담당 외국인과 상의하고 사실여부를 확인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한 과정을 거치면 그 회사가 입찰에 참가 하는지 여부와 입찰 참가자가 누구라는 것을 90% 이상은 알아 낼 수 있는 것이다. 발주처에서는 보통 한 프로젝트에 6개-7개 업체에게만 입찰 참가 자격 을 준다. 그 중 심혈을 기울이는 필사적인 업체는 3-4개 업체에 불과하다.
현지인을 통한 사실 확인이 여의치 않을 경우, 무대는 발주 공사의 기술회사가 있는 런던이나 프랑크프르트로 옮겨진다. 초창기 중동에서 발주 되는 공사의 기술 회사는 대부분 영국이나 독일 회사들이 그 주류를 이루었다. 기술회사( Engineering Consultant )는 발주처를 대신하여 입찰서를 준비하고, 응찰서를 평가하고, 프로젝트가 끝 날 때까지의 모든 절차를 대행하는 기술 감리 회사인 것이다.
런던지사, 또는 프랑크프르트 지사에 의뢰하여 기술회사로 부터 명단 입수를 요청한다. 평소 기술회사와의 유대 관계를 돈독히 유지 해 온 해당지역 지사에서는 기술회사 직원에게 베푼 간단한 저녁 향연 으로 귀중한 정보를 쉽게 입수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실패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일단 입찰 잠가자 명단을 입수 하면, 참가업체들의 기초적인 조사와 함께 과거 각종 행적에 관 한 정보를 총괄 적으로 분석 하는 것이다. 이들 업체들은 이미 중동에서 3년 여 동안 수십번 발주 된 국제 입찰에서 여러번 같은 분야에서 경쟁을 해 왔기 때문에 입찰에 임하는 취향을 어느정도는 파악하고 있기 마련이다. 과거 입찰에서 낙찰가의 몇 프로 선에서 투찰을 했는지?, 건축, 토목, 기계, 전기, 플랜트 중 어느 분야가 강한지 ?, 어느회사와 콘소시움을 구성 했는지? 신규로 수주한 공사는 없는지?등 해당회사에 대한 포괄적인 정보 수집이 이루어 진다. 知彼知己 면 百戰百勝 이라고 했던가?
경우에 따라서는 그 업체의 주 거래은행에서 발급되는 입찰 보증금을 알아 내는 방법도 동원 된다. 입찰 보증금은 통상 투찰 금액의 5% 이상을 제출 하도록 되어 있다. 입찰 보증금액을 알면 경쟁업체의 투찰 금액이 얼마인지 쉽게 가늠 할 수 있는 것이다. 입찰 보증금액을 역으로 이용하는 경우도 있다. 정보가 쉽게 빠져 나가리라 생각되면, 입찰 보증금액을 투찰 금액의 10 % 정도로 높힌다. 상대업체에서는 안심하고 투찰 금액을 높혀 들어 온다. 결과는 예상대로 나온다.
제다 법원의 출두 명령서를 본사에 보고한 후, 정확하게 10 시간만에 본사로 부터 지시사항이 하달 되었다.
첫째. 본건에 대하여 적극적인 자세로 임 할것.
둘째. 법정 출두인은 제다 지사장 정 부장으로 한다.
세째. 제다 지사장을 지원하기 위하여 M 변호사와 임원 한명을 현지에 급파한다.
네째. 향후 구체적인 절차와 시기에 관한 사항은 M 변호사와 긴밀히 접촉하여 상의 할 것.
( 의명 )
M 변호사란 훗날 국내 변호사 협회 회장도 지낸 경험이 있는 저명한 변호사이며, 현재는 그릅의 고문 변호사로 있는 분이다. ( 의명 ) 이란 왕 회장이 결재하고 지시 했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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